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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고 무자비한 저우융캉

편집부  |  201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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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장쩌민과의 친분을 이용해 승승장구하던 저우융캉은 왕리쥔의 망명시도 사건과 보시라이의 실각으로 세인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공안부장과 정법위 서기를 맡으면서, 사회 치안이 급격히 나빠졌고 범죄조직이 횡행하게 되었다. 정법위가 장쩌민-저우융캉 세력에 좌지우지되면서 오늘날 잔혹하고 무자비한 기관이 되었다.


저우융캉은 중국 정계에서 ‘장쩌민의 앞잡이로 아무런 책략도 없이 그저 연줄로만 출세해 그의 부하들조차 겉으로만 따를 뿐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인물로 통한다. 민간에서는 저우융캉이 아내를 살해한 다음 장쩌민의 외조카와 결혼 한 후부터 고속 승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우융캉은 올해 70세로 18대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왕리쥔 사건이 터지면서 보시라이와 함께 비밀리에 시진핑을 끌어내릴 정변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우융캉은 1966년 9월 베이징 석유대학 탐사학과를 졸업한 후,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이 싫어 학교에 남아 직업 할당을 기다렸다. 하지만 1년 후 마지못해 다칭(大慶) 유전에서 지질대 실습원이 되었다. 그는 대학 졸업장과 아부를 잘하는 성격을 이용해 41세에 랴오허(遼河)석유 탐사국장, 랴오닝(遼寧)성 시위원회 부서기 겸 시장이 되었다. 1985년 석유공업부 부부장 겸 중국 석유천연가스 총공사 사장이 되어, 성급 국유기업의 고위관리가 되었다. 저우융캉이 석유 계통을 관할한 13년 동안, 석유부는 가장 부패한 기관이 되었고 저우 역시 유흥업소에 자주 드나들면서 매우 타락한 생활을 보냈다. 


1998년 3월 국무원은 국토자원부를 창립하고 56세의 저우융캉을 초대 부장으로 임명했다. 1년 후 그는 쓰촨성 당서기가 되었다. 한 중국 언론인이 폭로한 바와 같이 저우융캉은 수많은 토지를 매매해 비자금을 조성했고, 13억 위안의 뇌물을 풀어 쓰촨성 당서기가 되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쓰촨성 위원회 서기를 맡은 동안, 여색을 밝히던 저우융캉은 여러 차례 부녀자를 강간했고, 주위의 직원이나 호텔 종업원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이런 더러운 행동 때문에 아내와 별거했고, 이후 전 중공 부주석 쩡칭훙이 장쩌민의 외조카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저우융캉이 석유부장이었을 때 쩡칭훙은 석유부 외사국에서 일했고, 두 사람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을 쌓았다. 쩡칭훙이 저우융캉에게 장쩌민의 외조카를 소개해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우융캉의 아내가 자동차 사고로 숨지는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저우융캉은 장쩌민 일가로 들어갔다. 저우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장 주석의 사람’이라고 과시했다.


저우융캉이 쓰촨에 있을 당시 그는 제멋대로 언론에 칼을 들이댔다. 2000년 그는 민주인사 황치(黃琦)의 ‘톈왕(天網)’ 사이트를 봉쇄하면서 인터넷 탄압의 시작을 알렸고, 황치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천부조보(天府早報)’는 ‘티베트 자치구 성립 50주년을 열렬히 경축한다’는 1면 제목을 ‘티베트 자치구 독립’이라고 잘못 쓰는 바람에 강제로 정간됐다. 같은 해 청두(成都) 최대 일간지인 ‘청두상보(成都商報)’는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간 당서기 사건’을 보도해 저우의 노여움을 샀다. 그 결과 ‘청두상보'는 공개적으로 비판받았고, 기사를 쓴 천칭(陳清) 기자는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2002년 ‘화시도시보(華西都市報)’는 장쩌민의 내연녀이자 유명 가수인 쑹주잉(宋祖英)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가 저우의 노여움을 사, 신문사 편집장이 사과했고 해당 기자는 해고됐다.


저우가 쓰촨성 당서기로 재직한 동안, 여섯 차례 민중에게 발포해 상해를 입혔다. 그 중 쓰촨 난충(南充) 지역에서는 발포로 300여 명이 사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동원된 부대는 모두 공안부대였다. 그는 또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전국적인 박해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당시 쓰촨성은 박해받아 사망한 파룬궁 수련자 수가 가장 많은 성 중 하나였다.


저우는 장쩌민 일가가 되기 전 간신히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지만, 장쩌민 일가가 된 후에는 곧바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서기처 서기가 되었다. 당내 직위만으로는 만족을 못한 장은 자춘왕(賈春旺) 공안부장을 최고 인민검찰원으로 좌천시키고, 저우에게 조용히 ‘공안부 주요직’을 겸직하게 했다. 당시 장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힐까 두려워 저우가 ‘공안부장’에 임명된 사실을 말하지 못하다가, 2002년 12월 7일 ‘인민공안보(人民公安報)’같이 아무도 보지 않는 군소 신문에 관련 소식을 흘리며 반응을 살폈다.


당시 저우는 장을 배후로 삼고 있었지만, 정법위 서기 뤄간에게 크게 훈계를 들었고, 때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장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뤄간이 물러난 후 장은 저우를 중앙 정법위 서기로 끌어올리고, 그의 명령에 반하지 않는 사람을 공안부장으로 세우려 했다. 모든 지방 관료의 명단을 살펴본 장과 저우는 장시(江西)성 위원회 서기이자 댄스광인 멍젠주를 적임자로 선택했다. 


중국 법조계 관련 인사들은 2002년 저우가 공안부장과 정법위 서기에 임명된 이후 중국의 법치가 급속도로 뒷걸음쳤고 사회치안도 순식간에 악화되었다고 인정했다. 또한 강력범죄가 줄지 않고 폭력조직이 활개를 쳐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중국의 형사사건 수는 매년 17~22%로 증가해 공안부문은 중국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부패하고 가장 어두운 기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에 도적은 깊은 산에 있었지만, 지금 도적은 공안에 있다’, ‘경찰과 도적은 한 가족’이라며 분노했다. 베이징 정협위원은 인터넷에 ‘오늘날 치안 질서가 이런 것은 모두 공안부장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글을 올렸다.


몇 가지 예를 보더라도, 저우가 얼마나 시비를 전도하고 사회를 어지럽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푸젠(福建)에서 저 유명한 라이창싱(賴昌星) 밀수사건이 발생한 후, 중공은 460여 명의 청, 국장급 간부와 73명의 부성장급 간부를 교체하고 저우를 중앙조사팀 팀장으로 파견해 푸젠성의 부패문제를 조사했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수없이 고발된 푸저우(福州)시 당서기 허리펑(何立峰)은 처벌은커녕 샤먼(廈門)시 당서기로 전임된 데 반해, 여러 차례 부패 관료를 고발한 푸젠 롄장(連江)현 당서기 황진가오(黃金高)는 감옥에 수감됐다.


2004년 8월 인민망은(人民網)은 황진가오의 ‘나는 왜 6년 동안 방탄복을 입었나’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는 밀수사건을 조사•처리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장과 전화를 26차례 받았다. 몇 년간 공안 당국은 보위요원을 보내 출퇴근을 경호했고, 가장 많을 때는 우리 집에 9명의 보위요원이 있었다. 나는 온종일 방탄복을 입고 지냈다’고 밝혔다.


황진가오는 푸저우시 재정위원회 당위 서기, 주임을 역임하다 2002년 1월 롄장현 위원회 서기로 밀려났다. 그는 그곳에서 600여 주민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롄장빈루 개축 공사의 부패문제를 조사•처리했다. 당시 비리로 인해 6,800만위안의 국유자산이 유실되었고 시민들도 300만위안을 잃었다. 그의 조사로 사건 진위가 뚜렷하게 밝혀졌지만, 범법자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저우가 푸젠에서 조사를 벌인지 1개월 후, 황진가오는 ‘4명의 정부 (情婦)를 뒀고 기생집을 드나들며 500만 위안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에 푸젠 관료들조차 ‘정말 탐오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금액에 어찌 무기징역을 받을 수 있는가? 이는 명백히 모함을 받은 것’이라고 탄식했다.


항간의 소문에는 황진가오가 2009년 7월 비밀리에 처형당했고, 가족들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널리 전해졌다. 누군가 황진가오를 면회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갔지만 한 번도 허가를 받지 못해, 외부에서는 그가 이미 저우와 자칭린에게 사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08년 7월 1일 중공 창당 81주년 기념일 당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양자(楊佳) 사건’이 일어났다. 베이징 청년 양자는 2007년 10월 상하이를 여행하던 중, 번호판이 없는 자전거를 빌렸다는 이유로 상하이 자베이(閘北) 공안분국 경찰들에게 취조와 구타를 당해 성 불구가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청원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칼과 망치, 분무제, 방진마스크, 화염병 등을 가지고 자베이 공안분국 건물에 난입해, 순식간에 경찰 6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전역이 들끓었다. 민중들은 한편으로 공안의 실전 능력을 비웃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안의 악랄한 태도를 비난했다. 양자의 ‘차라리 법을 어길지언정 일평생 억울하게 살지 않겠다’는 진심어린 목소리는 억압받고 있던 수많은 민중의 공감을 얻었다. 중공의 폭정이 민중들을 저항하게 만든 것이다.


민중들이 양자의 재판에 관심이 쏠려있던 2008년 10월 말 장은 처조카 우즈밍(吳志明)에게 2008년 10월 말 은밀히 ‘양자를 신속히 처리하라. 일이 지체되면 문제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장의 지령을 받았다. 그러나 책임을 지기가 두려웠던 우즈밍은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결국 장은 저우에게 직접 지시했다.


저우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나서면 언론이 따라다니며 보도하기 때문에 업무 시찰이라는 명분으로 11월 24, 25일 이틀 동안 저장(浙江)성을 방문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11월 26일 오전 상하이에서 양자를 비밀리에 처형하는 것이었다. 당시 저우는 멍젠주에게 동행을 지시했다. 이에 멍은 깊은 시름에 잠겨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한달 전 수백 명이 상하이 고등법원 앞에서 ‘공산당 타도’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상황에서 양자를 처형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멍은 저우에게 조심스럽게 양자의 처형을 잠시 늦추자고 말했다. 저우는 멍을 흘겨보고는 ‘너 같은 놈은 … 큰일을 치를 수 없다!’고 경멸하듯 말했다. 굴욕을 당한 멍은 돌아와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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