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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방, 그 실체를 파헤친다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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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얼마 전 발생한 왕리쥔 사건의 여파로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이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동아시아 연구소 임영철 소장님을 모시고 그에 관한 여러 정황에 대해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질문(문): 얼마 전 발생한 왕리쥔 사건 여파로 지난 4월 6일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가 전격 해임됐고 그의 상관인 저우융캉도 실각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이들과 관련된 상하이방의 중심인물인 장쩌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임영철 소장(임): 장쩌민은 1989년 6.4 천안문 사건을 배경으로 중국 정계에 등장합니다. 당시, 중공의 실권자 덩샤오핑의 첫 번째 후계자는 후야오방(胡耀邦)이었고 두 번째 후계자는 자오쯔양(趙紫陽)이었는데 이 들은 공통적으로 개혁적 성향이 강해 공산당의 정치나 투쟁보다는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의 생활향상에 도움이 되는 쪽에 많은 힘을 썼습니다.


그 후 보수파의 반발로 후야오방이 실각되고 자오쯔양이 총서기로 등장 하는데 1989년 4월, 후야오방의 갑작스런 사망을 계기로 베이징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당시 학생들의 입장을 동정하고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자오쯔양은 당 보수파들의 반발로 총서기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덩샤오핑의 세 번째 후계자였던 장쩌민이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덩샤오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혁개방이었기 때문에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고 후야오방, 자오쯔양과는 다른, 민주와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공산당 독재를 유지할 수 있는 후계자가 필요했으므로 상하이에서 학생시위를 강력하게 탄압한 상하이시 서기 장쩌민을 흡족히 여겨 세 번째 후계자로 발탁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성향이었던 장쩌민은 군부나 베이징 정계에 인맥이 많진 않았지만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덩샤오핑은 아주 조급한 상황에서 장쩌민에게 자신의 모든 권력과 직책을 주고 89년 6월 24일 제13기 4중전회에서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합니다. 그 후 11월 중공이 가장 중시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과 93년에는 형식적이긴 하나 서열 1위의 국가주석까지 명실공히 당∙정∙군 3권을 모두 장쩌민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당시 장쩌민은 상하이에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 모으고 총서기가 되면서 자신의 사람들을 발탁했는데 이들을 보통 상하이방이라고 합니다.


문: 현재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 제거대상이 된 이들 상하이방은 언제부터 결성되었나?


임: 1989년 장쩌민이 중공의 대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상하이방 세력이 형성됩니다. 대표적으로 상하이 시절 그의 부하들이었던 우방궈, 쩡칭홍, 황쥐, 천량위 등이 협의의 상하이방이라고 할 수 있고, 장쩌민이 총서기가 되면서 등용한 자칭린, 리창춘, 우관정, 류치, 장더장, 저우융캉, 류윈산 등이 상하이 배경은 아니지만 장쩌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광의의 상하이방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문: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청단파와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방 간의 모순이 증폭된 원인은 무엇인가?


임: 장쩌민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인 두 가지 권력이익이 있었는데 하나는 89년 6∙4사건을 계기로 자오쯔양이 실각되고 자신이 총서기로 발탁된 입장에서 6∙4사건을 명예회복하거나 자오쯔양을 해금시키는 문제에 대해 굉장히 민감했던 것과 또 하나는 89년도에 총서기로 등장했지만 실제로 내세울 만한 업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오쩌둥은 정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문화혁명이라고 하는 10년간의 대대적 탄압을 통해서 개인의 우상숭배와 독재를 강화한 인물이고 덩샤오핑은 군대를 쥐고 있어 89년 6.4 당시 학생들을 강경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배운 장쩌민은 자신의 권력과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희생양으로 파룬궁을 선택합니다.

 

장쩌민이 총서기로 있을 당시, 1992년부터 중국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파룬궁은 94년경 베이징에서 상당히 유명한 기공 공파의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장쩌민은 모든 상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파룬궁 탄압에 나섰는데 이때 후진타오나 주룽지 등은 혹시라도 이 문제가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라줄 사람이 필요했던 장쩌민은 뤄간, 저우융캉 등 상하이방 세력들을 등용하게 됩니다.


문: 그것이 상하이방의 중심이던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게 된 이유인가?


임: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을 흉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철저히 개인의 야심과 권력을 위한 추구, 그리고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개인적 질투심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 2002년 장쩌민이 총서기직을 그만두고 2003년부터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이 된 후에도 파룬궁 탄압이 계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임: 그것은 장쩌민의 월권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권력을 장쩌민에게 물려주면서 뭔가 불안감을 느껴, 다음 세대 지도자로 후진타오를 지명하고 당의 많은 원로들 앞에서도 발표했습니다. 2002년 16대를 앞두고 물러나야 했던 장쩌민은 6∙4와 파룬궁 탄압에 불안을 느껴 상하이방 세력을 대거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원래 7명이었던 정치국 상무위원에 이창춘과 뤄간을 추가해 9명으로 늘리면서 리창춘을 중공의 여론선전이나 이데올로기 담당 최고책임자로, 뤄간을 중앙정법위 서기로 공안이나 무장경찰 등 무력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세웁니다.

 

2007년부터 2012년 기간인 18대에서 리창춘은 그대로 임용되고 뤄간을 대신해 저우융캉이 그 자리를 맡는데 이처럼 장쩌민은 우방궈, 자칭린, 쩡칭홍, 황쥐, 우관정, 허궈창 등 자신의 부하들과 믿을만한 인물들을 대거 기용해 수적으로 앞도적이었기 때문에 후진타오나 원자바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 그렇다면 파룬궁 탄압에 동조했던 이런 인물들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임: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은 1999년 7월부터 시작해 그 후 몇 년간 심각한 탄압들이 계속됐는데 당시 탄압을 가장 주도한 사람은 중앙정법위 서기 뤄간입니다. 장쩌민과 뤄간은 현재 전세계 약 30여개 나라에서 반인류죄, 고문죄, 집단학살죄 등으로 기소된 상태고 태자당의 대부로 알려진 쩡칭홍 역시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그 외에도 리란칭, 우관정, 류치, 저우융캉, 류징, 보시라이, 천즈리, 리창춘 등 탄압에 앞장섰던 약 30명 정도가 같은 이유로 기소된 상태입니다.


문: 현재 17대 상무위원 중에도 상당수의 상하이방들이 있어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데도 후진타오가 이들을 몰아세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임: 현재 상하이방의 내부는 4분5열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현재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에서 광의의 상하이방 계열로 분류할 수 인물은 우방궈, 자칭린, 리창춘, 허궈창, 저우융캉 등이 있는데 이 중 전 충칭시 서기였던 허궈창은 보시라이와의 여러 가지 악연으로 이번에 보시라이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장쩌민을 따르던 상하이방의 원로 우방궈는 서열은 2위이지만 실권이 많지 않고 현재 후진타오쪽에 자신의 여러가지 비리나 약점이 잡혀 감히 발언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푸젠성 출신의 자칭린은 시진핑을 후계자로 세우는데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고 여겨 시진핑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장 받으려 하는 입장입니다. 또 리창춘은 원래 랴오닝성 선양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세력을 많이 구축했지만 후임이었던 보시라이가 자신의 세력들을 강경하게 몰아붙이고 탄압했기 때문에 보시라이와는 알력이 있어 결과적으로 9명의 상무위원 중 8명이 후진타오에 동조하는 입장이고 저우융캉 만이 고립된 상태에 처했습니다.


문: 지난 3월 실각된 보시라이에 이어 저우융캉도 이번 왕리쥔사건으로 실각된다면 나머지 상하이방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임: 한 마디로 4분5열,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해야 할 것은 상하이방내에서도 파룬궁 탄압에 주도적으로 나선 뤄간, 저우융캉, 보시라이, 쩡칭홍 등의 혈채파(피의 빚을 졌다는 뜻)와 장쩌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이들을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상하이방은 곧 와해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동안 상하이방이 파룬궁을 탄압을 13년 간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중국 내의 인터넷, 신문, 언론, 방송 등을 강력히 통제해왔던 선전부 총책임자 리창춘 대신 후진타오의 직계이자 공청단파로 알려진 류윈산 선전부장이 중공 선전계통을 장악하고 있고 공안, 무장경찰, 특무 계통을 총괄하는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이 이번에 실각된다면 상하이방의 모든 강력한 통제수단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처럼 강력하게 진실을 은폐할 수 있는 언론통제도 없고 더 이상의 무력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상하이방은 장쩌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문: 상하이방이 결국 와해된다면 10년 이상 자행돼 온 파룬궁 탄압은 종식될 수 있을지?


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장기간 파룬궁 탄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리창춘 중심의 언론통제 시스템으로 진상이 철저히 은폐됐기 때문인데 파룬궁 탄압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지됐던 이 정교한 언론통제 시스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경우 중공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죄악들, 특히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 혈채파들이 저지른 온갖 비리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만행들이 모두 폭로된다면 중국 민중들은 더 이상 파룬궁 탄압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공산당 지지를 철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공 내부도 급속도로 와해될 것이고 파룬궁 탄압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문: 천안문 사태와 파룬궁 탄압에 대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입장은?


임: 두 가지 문제는 약간 달리 접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후진타오나 원자바오는 후야오방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특히 후야오방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원자바오는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에 대한 해금으로 6∙4 사태를 명예회복을 시킬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머지않은 시간 내에 결정될 것으로 예상 됩니다.


하지만 파룬궁 탄압 문제는 약간 다른 견해로 보아야 합니다. 후-원이 파룬궁 탄압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지만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혈채파가 파룬궁에 대해 저지른 온갖 비인간적인 만행들의 폭로돼 더 이상 중국 공산당 자체가 존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입니다. 그래서 파룬궁 탄압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공산당 멸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후진타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조금 귀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아시아 임영철 소장님을 모시고 이번 사건의 핵심 세력인 상하이방에 대해 말씀 들어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곽제연이었습니다.

 

※ 임영철 소장: 서울대 물리학과 및 경희대 한의학과 졸, 현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및 서울 경희한의원 원장,  전 세계적으로 공산당 탈당 열풍을 일으킨 '9평 공산당'과 공산당 문화의 본질을 파헤진 '해체 당문화' 등 다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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