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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Info] 제1차 파리코뮌과 신고전주의 미술 (3)

편집부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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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A.H.

(전편에 이어) 다비드도 그와 관련한 나쁜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단지 자신이 그린 모든 것이 정치 선전임을 똑똑히 알고 있을 뿐, 당연히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보내는 데 찬성표를 던지자 혁명을 혐오했던 아내 샤롯(결혼 후 이름은 샤롯 다비드, 결혼 전 이름은 마거릿 샤롯 페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와 이혼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의하면 샤롯은 다비드를 올바른 길로 되돌리는 일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비드가 1794년에 권세를 잃고 두 번이나 감옥에 갇히자 샤롯은 다비드의 제자들과 함께 백방으로 구원 활동을 벌여 결국 그의 생명을 구했고, 매번 오래지 않아 그를 구해냈다. 그들은 1796년 11월 12일 재결합해 백년해로했으니 하나의 미담이라 하겠다.



당시의 죽음과 관련한 정치류 예술은 다비드의 작품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사령(邪靈)의 작용과 정치 풍조의 손상으로 인해 적지 않은 예술가가 이런 주제에 손을 댔다. 예를 들어 다비드의 동기인 장 밥티스트 레뇨가 그린 ‘자유 혹은 죽음’이 바로 그릇된 정치에 영합한 작품이다. 

그림 중간의 날개를 단 인물은 프랑스의 상징이며, 지구 상공에 떠 있다. 왼쪽은 자유 공화제를 상징하는 여신이고, 오른쪽은 죽음의 신이다. 이 주제는 공화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죽음의 정치 편향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록 그림 속 인물이 천사나 신화 속 인물의 모습이지만, 정교 신앙을 금지하고 대학살을 부추기는 사회적 배경하에서 이런 형상은 절대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바른 신앙을 타격하고 살인 혁명을 호소하기 위해 도용된 것임을 모든 사람이 안다.



다비드가 선전과 예술 부문을 주관한 데다 회화 기술이 뛰어났으므로 자연히 문하의 제자가 많았다. 이들 중 적지 않은 학생도 스승의 길을 따라 혁명 정치에 가담했다. 예를 들어 초기 공산주의 유파 바뵈프주의를 받아들인 토피노는 다비드의 총애를 받은 문하생 중 한 명이다. 

그의 대표작도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인 ‘카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일은, 주세페 세라치와 함께 무너진 자코뱅파 잔여 세력의 도움을 받으며 1800년 가을에 나폴레옹 암살을 모의했고 실패 후 함께 처형된 일이다.

다비드의 또 다른 문하생인 필립 오귀스트 엔느켕도 초기 공산주의 정변에 가담했다. 1796년 9월, 초기 공산주의 단체인 평등파의 조직원 수백 명이 원래 자코뱅파에 속했던 산악파 잔여 세력과 연합해 파리 서남(西南) 용기병(龍騎兵) 제21 기사단 주둔지인 그흐넬르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이들은 이미 와해한 코뮌을 재건해 공산주의의 토지정책을 실행한다는 망상을 했지만, 아주 빨리 궤멸했고, 엔느켕도 그에 가담한 죄로 투옥됐다.

■ 구별과 연계

나폴레옹 집권 후에야 이런 광분은 중단됐다. 1801년 7월 15일, 나폴레옹과 로마 교황은 정교 협약에 서명하면서 천주교회의 프랑스 국교 지위를 법률로 보장하고, 교회의 공개적인 종교의식 거행을 허용했다. 

동시에 공립 초등학교의 전통적 종교 교육을 회복하고, 교회 인사를 교사로 초빙했다. 이후 교회는 초등교육 방면에서 또다시 상대적으로 특수한 지위를 획득했는데, 즉, 교직원이 공립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당시의 예술은 그런 배경 속에서 정통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마침내 다시는 신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사형 협박을 받지 않아도 됐으나, 이때가 되어도 신을 묘사하는 작품은 갈수록 적어졌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계 곳곳에서 살인 혁명을 부추기는 마성의 독소는 더는 없었다. 

정통예술은 한 걸음씩 정상적인 궤도로 들어와 제국 시기부터 이후 이어진 신고전주의까지 전체가 이전의 고전주의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즉 17~18세기 아카데믹 미술 속으로 고전주의가 발전, 확산한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의 창작 중심도 더는 현실 정치에 있지 않았고, 점점 일부 신화와 순수한 예술 주제로 쏠렸다. 이 점은 신고전주의 후기의 대표적 인물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등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전의 ‘혁명예술’을 돌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듯이 그런 폭력 살인을 선동하는 작품과 정상적인 고전 작품이 미술 기법상에서는 큰 구별이 없지만, 작품의 취지와 구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즉, 한 폭의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예술 창작의 핵심이다. 한 예술가에게 작품의 사상 내포의 중요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역사의 과거든 현재든 만약 한 예술가가 바른 믿음을 유린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정권을 찬양한다면 작품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천리를 어겼기 때문이다. 예술은 최초에 신에게서 왔고, 사람들의 미덕을 제고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의 구상은, 창작을 통해 영혼에 미치는 작용이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신고전주의 미술이 전체적으로 전통 기예를 활용했고, 아카데믹 미술의 표현 방식을 사용했으므로 홀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비드를 포함한 수많은 예술가가 미술 기법상 확실히 탁월한 성취를 이뤘고, 이 점도 일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단지 특정 연구를 통해 오늘 우리가 앞사람의 것을 참고하는 것이며, 순수하게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의 작품에 대해서도 구분과 선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라의 죽음’처럼 악을 추앙하고 사람의 지혜를 오염시키는 작품은 긍정적으로 연구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하다.

아마 어떤 사람은 당시의 죽음을 표현한 일부 작품을 비극적 주제에 따른 전통의 조류로 인식할 것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그런 요소가 있으나, 실질상으로는 여전히 진정한 전통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비록 예로부터 비극을 소재로 한 작품이 존재해 왔지만, 전통적인 비극 창작은 사람들 마음속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인성 속의 동정과 선량함을 불러일으키는 데 목적이 있거나, 사람에게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고 진리를 탐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혁명 전후로 수많은 예술 소재가 완전히 정치화됐으니 정치선전 도구가 된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들은 혁명 정치를 위해 인간 표층의 조잡한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이전의 전통 사조와는 전혀 달랐다.

이런 작품에는 큰 뜻이 없고, 사회 형세에 따른 얄팍한 관념뿐이었으니 예술상으로는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런 유의 이른바 비극 주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생명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반대로 충동질과 자극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살육을 추구하고, 불량배 정권을 찬미했다. 

적지 않은 작품의 취지는 냉혹한 ‘혁명성’으로 인성과 온정을 학살하고, 국가 정권 만능주의를 부추기는 것이었으며, 폭력 혁명을 선동하는 열기가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정도에 이르렀다(예를 들자면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 유의 작품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구체적인 작품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도 역사의 요소가 뒤섞여 복잡하며, 사람의 일생에 선행과 악행이 존재함을 알았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상 예술가가 모두 검지 않으면 희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폭력혁명 선전 그림을 적지 않게 그린 다비드도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다. 

세력을 잃고 감금된 기간에 그는 창작의 방향 문제를 생각했다. 1796년 초부터 정식으로 창작을 시작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에서는 ‘사랑으로써 충돌을 끝내는’ 것을 취지로 한 작가의 예술적 전환을 엿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다시 궁중 수석 화가로 임용했을 때 다비드의 작품은 원래의 혁명을 선동하는 주제와 이미 작별을 고했다. 비록 제왕을 칭송하는 회화도 정치 방면의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폴레옹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종교적 대관식을 거친 황제였다. ‘신이 왕권을 부여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나폴레옹의 권력은 승인받은 왕권에 속했다. 

그래서 비록 19세기 다비드의 궁정 작품에 여전히 정치적 기운이 다분했지만, 더는 정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리던 중에 교황 비오 7세를 만났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도 애초의 혁명가에게 점점 자기 인생의 위치를 찾게 했다.

다비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프랑스 예술비평가 에티엔 장 들레클뤼즈(1781~1863년)는 자신이 남긴 논평 중에서 다비드가 혁명 정치에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았고, 대혁명의 정치에 가담한 기간에 한 말도 기본적으로 모두 예술, 예술 담당자, 예술기관과 그가 주관하는 축전 방면의 내용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다비드가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광란의 시대에 예술을 주관하는 관리로서 많은 순간 ‘붉은 물결에 휩쓸려 어쩔 수가 없었다’는 관점도 존재한다. 그는 미쳐 날뛰는 인간 백정이 전혀 아니었고, 인간 백정이 권력과 도살용 칼을 지배할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들에게 영합한 것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다비드의 그런 행동이 사실은 그의 예민한 정치적 후각에 기인한 것으로, 먼저 적시에 혁명가 쪽으로 기울었다가 자코뱅파가 무너진 후에는 또 적절한 시기에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은 것이지, 폭력혁명의 사악함을 진정으로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분명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것은 수많은 일을 역사 인물의 생각이 아닌 실제 행위로 가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사유 근원이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순간 다른 요소가 사람의 뇌에 반영되어 온갖 생각이 일어날 수 있어 사람의 생각을 일종의 불안정한 상태에 빠뜨리므로 한 사람을 진정하게 평가하려면 여전히 그의 행위를 보아야 한다. 

다른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인생의 길은 사실 잘 배치된 것이며, 그 과정 속의 이런저런 생각은 수많은 실질적인 문제를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이해조차도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당시 역사 인물의 생각을 추측하는 것은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것만 못하다. 사람의 행위를 참작해 판단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며, 수많은 일이 일목요연해진다.

대단히 유명한 본보기가 있다. 과거 예수를 처형하라고 명령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빌라도로 알려진 유대인 지방의 로마 총독)는 예수가 무고한 좋은 사람임을 알았고, 예수가 이전에 신통력으로 필라투스의 외아들이 앓던 불치병을 고친 적도 있었으므로 예수를 처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압력을 받자 대중 앞에서 물을 떠다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 의로운 사람의 피를 흘린 죄는 나에게 있지 않으니 당신들이 감당하시오!” 그리고는 예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비록 필라투스가 마음속으로 예수가 좋은 사람임을 인정했고, 입으로도 예수를 의인이라고 했지만, 행위상으로는 여전히 크게 나쁜 일을 저질렀으므로 여전히 거대한 죄업을 감당해야 했다. 

필라투스가 예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후, 원래 병을 고쳤던 아들이 땅에 넘어져 사망했고, 머지않아 필라투스 자신도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벼슬길에도 아주 빨리 곤란이 닥쳐 그는 갈리아로 유배당했다. 

그와 동시에 토지도 몰수되어 무일푼이 됐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사약까지 받았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절망 속에 분신자살할 수밖에 없었고, 훼손된 시신마저 강물에 던져져 물고기의 먹이가 됐다.

역사 인물의 이런 모습은 지금의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날 수많은 중국인이 마음으로는 중공의 숱한 악행을 알고, 심지어 몰래 중공 사당을 크게 욕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당·탈단·탈대를 하지 않는 상황이며, 중공의 혈기를 향해 독한 맹세를 한 공산당·공청단·소선대원들은 여전히 중공의 일부이자 중공의 분자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늘이 중공을 소멸할 때, 탈퇴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연루되어 위험에 처할 것이다.

알다시피 진정하게 사악한 것은 사실 사람을 해치는 사령이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예술가와 다른 직업인, 고대와 현재를 막론하고 혼잡하고 어지러운 형세 속에서 일생 난을 겪다가 마지막에 인생의 위치를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제1차 파리코뮌 시기의 예술작품에 대해 인류의 현존하는 이론으로 말하자면 당시에 비록 사령의 교란이 있었지만, 세간의 이론으로는 아직 완전히 공산주의로 분류되지 않았다. 

우리도 그것들을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로 규정하지 않고, 단지 구체적인 작품으로 다루고 변별해, 예술 연구를 할 때 사령 요소에 틈타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상의 그런 예술가들이 만약 사악한 내용을 묘사하지 않고 바르고, 전통적이고, 우수한 작품을 그렸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를 자비롭게 대한다. 

맥락을 분명히 이해한 다음에 옛사람의 작품을 연구해야만 더욱더 쉽게 전통 미술 속에서 올바른 참고를 얻고, 신이 전한 예술로 회귀할 것이다. (끝) / 明慧網


참고자료

Augustin Barruel,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du jacobinisme’, 1798

Étienne-Jean Delécluze, ‘Louis David, son école et son temps: Souvenirs’, 1855

Epoch Times, ‘Comment le spectre du communisme dirige le monde’, 2018

Epoch Times, ‘Neuf commentaires sur le Parti communiste’, 2004

Frans de Haes, ‘Aux sources du XIXe siècle: les Mémoires du peintre Philippe-Auguste Hennequin(1762-1833)’, 2007

Joshua Philipp, ‘The Dark Origins of Communism’, 2017

Tite-Live, ‘Histoire romaine’, 1940

Voltaire, ‘Lettre à Frédéric II, roi de Prusse’, 1767

William Fleming, ‘Arts and Ideas’,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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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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