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화궈펑(华国锋) 전 중공 주석은 원래 마오쩌둥이 결혼하기 전 얻은 아들입니다. 중공 16대 직전 화궈펑은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 성을 마오(毛)로 고칠 것을 중공중앙에 서면으로 요구했지만, 마오쩌둥 사후 그가 정계에서 계속 실수를 범하자 중공은 화궈펑의 실체를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습니다.
홍콩 잡지 ‘동향’에 따르면, 중공 16대 직전 당내에서 이름뿐인 중앙위원 자격을 내놓고 평당원 신분을 회복한 화궈펑은 중앙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 친부나 친모의 성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중공중앙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002년 12월 26일,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딸 리민(李敏), 리너(李讷)와 마오 생전의 기밀비서 겸 정부(情婦)였던 장위펑(张玉凤)과 함께 마오의 기념당을 방문해 그의 생일을 기렸습니다. 당시 화궈펑은 ‘충실한 아들 궈펑이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적힌 화환을 헌화했으나, 그날 오후 기념당 직원에 의해 치워졌습니다.
1920년, 마오쩌둥이 창사(长沙)에서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했을 당시, 야오(姚) 성을 가진 한 여성을 알게 됐습니다. 야오의 부친은 산시(山西)에서 후난(湖南)까지 담배를 갖다 파는 상인이었는데, 1921년 야오가 마오쩌둥과의 사이에서 화궈펑을 낳자 마오쩌둥의 두 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杨开慧)는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창사에서 동거 중이었으며, 야오는 화궈펑을 낳고 2년 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1922년 10월,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마오안잉(毛岸英)이 태어났습니다. 마오는 화궈펑을 친척에게 위탁해 키우게 했고, 그후 화궈펑을 산시성 타이위안(山西太原)에 보냈다가 다시 자오청(交城)으로 보내 그를 키운 친척의 성을 따 화광주(华光祖)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화궈펑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화청우(华成武)로 이름을 고쳤다가 국공내전 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다시 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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