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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 주석의 訪美 징크스 (2)

편집부  |  20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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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2013년 6월 7일부터 8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써니 랜즈 농장에서 비공식 미중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이 회담을 마치고 시 주석이 귀국한 뒤, 같은 달 23일 18년간 저우융캉의 비서였던 궈융샹(郭永祥) 전 쓰촨성 부성장이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보시라이에 대한 법정 심문이 5일간 진행됐고, 10월 25일 결심재판이었던 2심에서도 1심 판결대로 보시라이의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한 달 뒤인 11월 15일, 시 정권은 중공 18대 3차 회의에서 노동교양 제도 폐지를 발표했다. 강제 노동 수용소는 1999년부터 시작된 파룬궁 탄압 정책으로 구속된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주요 수용시설로 사용됐고, 내부에서는 날마다 처절한 고문이 이뤄지고 있었다.


또 같은 해 베이다허 회의 전후에 저우융캉은 적어도 두 차례 시진핑 암살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도됐다. 이 암살 계획 실행범은 저우융캉의 부하이자 보디가드였던 탄훙(譚紅)이었다.


그 해 12월 1일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됐고, 같은 달 20일에는 정법계통에 있는 저우융캉의 심복이자 파룬궁 박해 전문기관인 ‘610 판공실’서기 겸 공안부부장이던 리둥성(李東生)에 대한 조사도 시작됐다.


2015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시 주석은 미국을 공식 방문, 유엔 창설 70주년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시 주석의 방미는 시진핑 진영과 장쩌민파 세력의 공방이 치열해지던 시기와 겹쳐 있었다.


시 정권은 2015년 5월부터 ‘사건은 반드시 입건하고, 소송은 반드시 처리한다(有案必立、有訴必理)’는 내용의 입건 등록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중국 전역에 걸친 파룬궁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이유를 들어 장쩌민에 대한 법의 심판을 요구하는 파룬궁 수련자와 탄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반인도적 범죄, 대량 학살죄’로 최고인민법원과 최고 검찰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그에 대한 장쩌민파의 반격도 거세졌다. 5월 28일부터 7월 하순까지 중국의 A주(중국 내 투자자 전용 주식)가 각각 4차례에 걸쳐 대폭락했고, 이후 이 주가 대폭락은 장쩌민파 세력이 시 정권의 전복을 노린 ‘경제 쿠데타’였던 것으로 판명됐다.


또 7월말에는 장쩌민 일파가 ‘베이다허 쿠데타’를 기획했다는 정보가 유출됐고, 8월 12일에는 톈진 방하이신구(浜海新区)의 화학약품 창고가 대폭발한 사고가 일어났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폭발 역시 베이다허 회의에 참석하는 시 주석 등 당 지도부를 노린 암살 미수였다.


한편 시진핑 측도 6월 11일 저우융캉에 대해 무기징역 판결을 내렸고, 7월 20일에는 중앙정치국이 링지화(令計畫)의 당적 및 공직 박탈 결정을 내렸다. 또 8월 30일에는 궈보슝(郭伯雄)의 당적 박탈도 결정해, ‘국가급 대호랑이’라고 불린 장쩌민파 핵심 3명을 잇따라 실각시켰다.


당시 방미 중이었던 시 주석은 시애틀‐워싱턴‐뉴욕을 오가는 과정에서 ‘장쩌민을 법으로 심판할 것’을 요구하는 파룬궁 수련자들이 든 현수막과 많이 마주쳤다.


시 주석이 미국에서 귀국한 당일인 9월 29일, 중국 관영언론은 중기위 기관지에 게재된 기사를 전재했다. 기사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전쟁터에 나서며(前出塞)’안의 ‘사람을 쏘려면 먼저 타고 있는 말을 쏘고, 적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적의 왕을 사로잡으라 (射人先射馬 擒敵先擒王)’는 구절을 인용해 장쩌민파의 우두머리인 장쩌민을 잡을 것을 은유한 것으로 보여져 중국 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11월 10일과 11일, 아이바오쥔(艾寶隽) 상하이 부시장, 뤼시원(呂錫文) 베이징시위 부서기가 잇따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중국 관영언론은 그 같은 상황에 대해 ‘큰 호랑이 사냥’은 초기단계부터 엄격하게 시행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 기사는 또 ‘정치국 상무위원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刑不上常委)’는 불문율은 이미 무효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후 장쩌민파 인물에 대한 불리한 정보가 난무하고 실각도 계속 이어졌으며, 동시에 군 개혁도 조용히 추진됐다. (계속)



김주혁 기자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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