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차 회의가 지난 5일 개최됐다. 이번 회의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철폐를 포함한 헌법 개정안 초안이 발표됐다.
전인대 간부는 국가주석의 임기 철폐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권위와 통일적 지도를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헌법 개정은 지난해 당 대회 개최 직전인 9월 29일 시 주석이 참석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개헌안이 통과되면 1982년에 제정된 현행 헌법, 이른바 ‘82 헌법’에 대한 다섯 번째 개정이 된다.
중국 공산당 정권은 1954년 9월 20일, 제1기 전인대 제1차 회의에서 최초 헌법을 공포했다. 당시 국가주석에 대해서는 ‘임기 4년’이라는 기술에 그쳤고, 임기 제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에서 공산당 정권 최초의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이 선출됐다.
1959년까지 마오쩌둥은 당 주석, 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그리고 국가 주석을 맡아 최고 권력으로 군림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당내 2인자인 류샤오치가 국가주석에 올랐다.
류샤오치는 1968년 사망 시까지 약 9년간 국가주석을 지냈다. 당 내에서는 일정한 실권을 쥔 류와 마오쩌둥의 권력투쟁이 있었다. 류는 문화대혁명으로 1966년부터 오랫동안 구금되어 폭행을 당했고 1968년 사망했다. 이후 국가주석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1970년 국가주석과 부주석 철폐를 제안했지만 당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1975년 진행된 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석, 부주석직은 정식 철폐됐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82년, 당 최고 실력자가 된 덩샤오핑 주도로 개헌이 이뤄져, 국가주석 및 부주석직이 부활됐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경험에서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두었고, 국가주석에 대해서는 실권을 갖지 않는 상징적인 원수로 정의했다. 덩샤오핑은 당시 국가주석도 아니고 총비서도 아니었지만, 사망 시까지 중국에 대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시사평론가 스타오(石濤)는 마오쩌둥의 국가주석, 부주석 철폐와 덩샤오핑의 국가주석 임기 제한에 대해 ‘마오도 덩도 자신만의 독재정치를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타오는 이번 국가주석, 부주석 임기 철폐 개헌안이 통과하면 1954년 최초의 헌법 내용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평론가 리린이(李林一)는 2012년에 최고 권력자가 된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확립한 3개 불문율을 잇달아 허물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차차기 후계자 지명 제도, 둘째는 국가주석의 임기제한 제도, 셋째는 집단지도 제도이다.
집단지도란, 최고 지도부인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7명 혹은 9명)이 중요한 정책을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체제로,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의 개인숭배와 독재정치의 교훈에서 이 체제를 결정했다.
또 각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각각의 분야를 주관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예를 들면, 당 총서기가 국가주석과 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을 겸해 정부와 군을 장악한다. 다른 상무위원은 국무원 총리,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감사위원회 서기를 맡는다.
이 같은 분업협력 구조를 ‘구용치수(九龍治水)’라고 한다. ‘구용치수’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각각이 독립 왕국이 되어 최고 지도자의 지시가 확실하게 집행되지 않는 면도 있다. 또한 여러 상무위원이 당내 같은 파벌에 속해 세력이 강해지면 당 총서기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
2002년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가 당 총서기에 취임했다. 그러나 전임자 장쩌민은 지도권을 내놓지 않았다. 장쩌민의 뜻에 따라 1기 행정부에서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수를 7명에서 9명으로 늘렸다. 이들 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를 제외하면 나머지의 7명은 모두 장쩌민파 인물들이었고, 최고 지도부는 장쩌민파의 뜻대로 조종됐다. 10년 이상 ‘(후진타오 등의) 정령(政令)이 중난하이(당 지도부)에서 나온 적이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장쩌민은 2004년까지 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에 머물며 군을 장악했다.
2012년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군과 정부에 대한 전권을 시진핑에게 넘겼다. 당시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수는 다시 9명에서 7명이 되었고, 7명 중 시진핑, 리커창, 왕치산이 시진핑 진영이고, 장더장, 류윈산, 장가오리는 장쩌민 진영이다. 위정성은 파벌색이 옅다.
재미 중국 경제전문가 허칭롄(何清漣)은 지난달 26일 블로그에 게시한 논평에서 시진핑은 1기에서 반부패 운동과 군 개혁을 통해 권력집중에 힘을 모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 주석이 1강 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구룡치수’ 체제를 계속할 경우 후진타오의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가을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대부분 시 주석의 측근이다.
지난해 당 대회에서 고령을 이유로 최고 지도부에서 물러난 왕치산은 이번 전인대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될 전망이다. 시 주석의 오른팔로 불려 온 그는 정계 복귀를 통해 ‘8번째 상무위원’으로 불릴 만큼 실권을 쥐게 됐고, ‘시왕(習王) 체제’는 향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중국 정치를 좌우해 온 집단지도 체제 약화는 불가피하고, 시 주석으로의 권력집중이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1강이 된 그가 보다 많은 책임을 떠맡게 되면서 중국의 향후 정권 운영 방향에 대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사진: AP/NEWSIS)
권성민 기자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