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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건은 학생시위 이용한 쿠데타”

김주혁 기자  |  201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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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은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실각을 노린 덩샤오핑의 음모였다.”


전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비서였던 바오퉁(鮑彤)은 톈안먼 사건 29주년을 맞아 이렇게 말했다.


그 해 당내 개혁파로 여겨진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중국 각지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요구 활동이 거세졌다. 6월 4일 덩샤오핑은 학생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최근 해금된 영국 기밀정보에 따르면, 당시 진압으로 1만 명 이상의 학생과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즈는 ’6·4 톈안먼 사건’ 29주년을 맞아 지난달 23일에 있었던 마오쩌둥의 비서였던 리루이(李鋭)의 딸, 리난양(李南央)과 바오퉁과의 담화 내용을 보도했다.


바오는 덩샤오핑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한 이유에 대해, “공산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던 기존 인식을 부정하고 “덩샤오핑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후르시초프를 비판했듯이, 덩샤오핑이 자신이 사후에 자오쯔양으로부터 비난받을 것을 피하기 위해 학생 시위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1987년 최고 권력에 오른 덩샤오핑은 ‘부르조아 자유화 반대’를 외치며, 개혁개방 노선을 주장하는 후야오방을 당 총서기에서 해임하고 같은 해 정치국원으로 강등시켰다. 후는 해임된 후 사망하기 전까지 정치개혁을 계속 촉구했다.


후야오방은 1989년 4월 15일 사망했다. 사흘 뒤인 18일,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후의 장례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리펑 총리는 자오쯔양에게 학생들이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활동을 벌이는 데 대해 의견을 구했다. 자오는 “우리도 후를 애도하고 있는데, 학생들의 추모활동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오퉁에 따르면, 이 발언을 계기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해임된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를 용인하면, 덩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오는 “자오쯔양의 발언을 들은 덩샤오핑은 자오가 중국의 후르시초프라며 곧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후르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 독재정치, 숙청사실 등을 공표한 인물이다. 바오는 "덩이 사후 명예실추를 피하고 싶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4월 18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후야오방의 장례에 대해 “전국 각 정부기관과 해외 대사관에서 반기를 게양하고, 10만 명 규모의 영결식을 실시한다. 영결식 사회는 양상쿤(楊尚昆)이 맡고, 자오쯔양은 조사를 읽는다. 덩샤오핑도 영결식에 참석한다. 조사에서는 후야오방을 높이 평가하는 문구를 담는다”와 같은 세부 계획을 결정했다.


위원회 측은 4월 20일 ‘후야오방 동지의 사망에 대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는 데에도 합의했다. 이 성명은 당시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된 후 분노로 심장 발작이 일어나 사망했다”는 설이 나돌면서 학생들의 분노가 커진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19일이 되자, 10만 명 규모의 영결식 개최와 후야오방을 평가하는 문구 도입 취소와 함께 성명서 발표 계획도 취소됐다.


바오퉁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계획들을 취소할 수 있는 사람은 덩샤오핑 밖에 없다. 그 목적은 학생들과 당국의 대립을 격화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바오퉁에 따르면 19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에게 (혼란한 시국에) 자신이 북한을 예정대로 방문해야 할지에 대해 물었고, 덩은 예정대로 진행하라면서 자오에게 “귀국한 후 당신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하겠다”고 답했다.


덩은 당시 자오쯔양을 경계하며 그를 총서기에서 끌어내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자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런 약속을 한 것이었다.


22일 후야오방의 영결식에서 자오는 다른 상무위원들을 통해 18일 결정된 3가지 사항을 확인했다. 그 내용은 △ 영결식 후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것, △ 그 과정에서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 것, △ 학생들의 ‘민주화, 반부패’ 등의 요구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것 이었다.


자오쯔양은 23일 북한을 방문하기 전, 리펑에게 전날 상무위원회가 결정한 3개를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25일, 학생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바보퉁에 따르면, 이날 학생들은 대부분은 학교로 돌아갔기 때문에 ‘폭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이 당시 상황을 ‘폭동’으로 규정한 것은 학생들과 당국 간 대립을 격화시키고, 그 책임을 자오쯔양에게 돌려 조기 퇴임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다음날인 26일, “학생들의 시위는 일부 속셈을 가진 자가 중국 공산당 정권과 현행 정치제도를 전복하려는 음모”라는 내용의 논설을 실었다. ‘4·26 사설’로 불리는 이 논설에 베이징 대학생들은 격노했고 또 다시 시위가 일어났다. ·


27일, 베이징 대학생자치연합회가 주도한 시위에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해, 톈안먼 광장으로 진행하면서 시위를 벌였고 많은 시민들도 이를 지지했다.


4월 30일, 북한에서 귀국한 자오쯔양은 분노가 정점에 달한 학생들을 목격했다. 당시 중국 최고 지도부는 자오쯔양의 융합파와 리펑의 강경파가 대립했다.


5월 11일, 학생들은 인민일보 측에 ‘4·26 사설’ 취소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3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방중했다. 자오쯔양은 고르바초프와 회담한 후 기자들에게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에게 있음을 시사했다.


5월 17일,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열렸고 참석한 상무위원들은 자오쯔양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않으면 ‘내전’ 또는 두 번째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자오쯔양은 이에 대해 반대했고 회의 후 사표를 제출했다.


바오퉁은, “자오쯔양의 계획이 예정대로에 실행됐다면 학생들의 시위는 초기에 진정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오퉁은 이처럼 29년 전 톈안먼 사건은 실질적으로 덩샤오핑이 자오쯔양의 실각을 노린 쿠데타였다고 분석했다.



김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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