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지난해 중국 ‘백지시위’에 참여해 공안(경찰)에 붙잡혔다가 목숨을 건 망명에 성공한 중국인의 생생한 증언이 공개됐다.
지난 5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세계자유회의(WLC)’가 개최됐다. 올해 행사에는 56개 독재국가에서 200여 명의 민주주의·인권 활동가들이 참여해 소통하고 화합하는 시간을 가졌다.
WLC에 참석한 백지시위 참여자 후앙이청(26·Huang Yicheng) 씨는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서슬퍼런 중국 공안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시진핑 아웃(XI OUT)’을 외쳤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베이징대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한 후앙 씨는 이번 인터뷰에서 ‘백지시위(White Paper Movement·白纸运动)’가 태동한 배경과 이 사건으로 구금돼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는 중국인들의 처우에 대해 고발하며 절규했다.
그는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19 정책’으로 수많은 사람이 집안에서 굶어 죽었고 심지어 불이 났는데도 집 밖으로 대피하지 못해 타 죽었다”며 “보다 못한 시민들이 정책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들이 ‘백지시위’의 모태가 됐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봉쇄는 사실상 가택연금 수준으로 시민의 외출을 막고 발을 묶어 강한 반발을 샀다. 비단 생계의 문제를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된 구호 조치를 정부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진핑 총서기에 대한 불만은 점차 누적됐고 결국 ‘백지시위’를 통해 ‘시진핑을 축출하라(XI OUT)’는 구호로 분출됐다. 국가 수장의 퇴출을 수만 명의 시민이 거세게 외치는 시위는 중국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후앙씨는 ‘백지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상황에 대해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다”
지난해 11월 26~27일 이틀간 상해의 우루무치 도로에서 삽시간에 확산한 백지시위는 중국의 강경한 코로나19 봉쇄 정책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시민이 자발적으로 ‘코로나19 봉쇄 정책을 해제하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비롯됐다.
후앙씨는 “시위 이틀째인 27일 공안들이 시위 참여자들을 무지막지하게 붙잡아 끌고 갔다”며 “연행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공안은 그들의 손과 발을 한 명씩 나눠 붙잡고 짐짝 나르듯 실어 갔다”고 고발했다.
이어 “그런 모습을 보곤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풀어 주라’고 외쳤는데, 그러자 공안 5명이 달려들어 나를 거꾸로 둘러업고 경찰 버스로 끌고 갔다”며 “끌려가다 턱이 바닥에 부딪혀 턱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가슴과 다리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호송버스로 끌려가다 안경이 벗겨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계속 얻어맞아야 했다”며 “내 인생에서 이보다 공포스러운 순간은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런 상황에서 탈출은 불가능했지만 후앙씨는 운이 좋았다.
그는 공안이 시위하다 잡혀들어 온 여학생에게 집중하면서 탈출 기회가 생겼다. 공안들은 그 여학생에게 핸드폰 비밀번호를 물었는데, 소셜 계정이나 핸드폰에 내장된 추가 정보를 통해 시위 확산의 주범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후앙씨는 “여학생이 비번 공개를 거부하자 팔뚝이 굵은 큰 몸집의 공안이 작은 체구의 마른 여학생을 무참하게 때렸다”며 “큰 손바닥으로 여학생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구타하는 장면을 공안 버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비디오로 찍자 공안들이 버스 창문에 있는 커튼을 치느라 분주했을 때 바깥으로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공안의 계속되는 추적으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그는 중국을 탈출하기까지 약 4개월간 피가 마르는 초조와 공포를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고향을 등진 그는 독일 망명길에 올랐고 현재 현지의 모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후앙씨는 “언론에 보도가 많이 나와 백지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금된 이들이 석방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금된 시위자들은 감옥에서도 여전히 ‘백지시위’를 하는 것으로 안다”며 “중국에선 이 운동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고 ‘시진핑 축출’을 구호로 외친 것은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 이후 처음 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 “집에 갇혀 굶어 죽고, 타 죽고”
후앙씨는 당시 시위 규모를 약 2만~2만5000명으로 봤고 30개 도시 100여 개 대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백지시위와 관련, 해외로 망명한 사람은 10명 남짓하다고 한다. 이들은 중국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시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앙씨는 ‘백지시위’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 두 사건을 언급했다. 하나는 강경한 코로나19 봉쇄정책으로 통제되던 곳에서 불이 났지만 제대로 된 구조를 받지 못해 사람들이 갇힌 채로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는 “상하이 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방대원이 출동했지만 코로나19 제로 정책 때문에 봉쇄돼 건물에 진입할 수 없었다”며 “건물 안에 있는 주민들도 밖에서 문을 잠가 탈출할 수 없었고 이웃들은 꼼짝없이 갇혀 죽는 걸 봐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분노가 분출구를 만난 게 백지시위였다”고 말했다.
또한 ‘베이징 브릿지맨’ 사건도 중공이 코로나 봉쇄를 해제한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
후앙씨는 “지난해 3월 중국 정부가 단 3일만 코로나19 봉쇄정책을 시행한다고 했지만 시한이 연장됐다”며 “3개월 이상 밖에 나가지 못한 채로 매일 집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아사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애가 죽은 엄마와 함께 며칠간 집에 있어야 했는데 그 와중에 아파트 화재로 많은 주민이 타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누군가 베이징 다리 한가운데에 6개 문장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설명했다.
후앙씨에 따르면 현수막엔 ‘PCR 검사 말고 밥이 필요하다’ ‘봉쇄가 아닌 자유를 원한다’ ‘거짓말 멈추고 존엄을 지켜달라’ ‘문화혁명 필요 없고 개혁이 필요하다’ ‘영수가 아닌 투표를 원한다’ ‘노예가 아닌 공민이 되길 원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제로 정책에 관해서도 “봉쇄만으로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면 시진핑은 유럽에서 공부한 김정은보다 머리가 나쁜 것”이라고 봤다. 일각에선 공무원인 부친의 후광을 입은 시진핑의 ‘아빠 찬스’를 언급하기도 한다. 일국의 지도자가 될 깜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하이 화재 사건과 베이징 브릿지맨 사건이 백지시위로 이어진 결과 봉쇄정책이 해제돼 많은 사람이 자유를 얻었으나 자유를 외치며 길거리에 나왔던 이들은 여전히 감옥에 구금된 상태”라며 “중국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도록 전 세계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스카이데일리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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