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봉니(封泥)는 니봉이라고도 하며 옛날 중국에서 문서 따위를 끈으로 묶어 봉할 때 쓰던 아교질의 진흙덩어리입니다.
봉니 위에는 고대인들이 사용한 인장의 유적이 있어 당시의 관제와 행정설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고대의 문자나 관작(官爵) 및 지명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사료로 쓰입니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고대인들은 대나무나 나무판 또는 비단을 이용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서신을 죽간이나 1척 길이의 목판을 나타내는 척독(尺牘), 1척 길이의 비단을 나타내는 척소(尺素)등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소(素)란 비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에는 왜 서신에 봉니를 썼을까요? 문헌 기록에 따르면 전국시대부터 중국인들은 간독(簡牘)에 글을 써왔습니다.
간독이란, 가늘고 폭이 좁은 죽편과 나뭇가지를 지칭한 죽간과 목간, 비교적 넓고 두터운 죽편과 목판을 지칭한 죽독, 목독의 총칭입니다.
때문에 후세에는 간독을 전적(典籍)이나 서신(書信)의 통칭으로 썼습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간(簡)은 첩(牒)이다'라고 했습니다.
첩은 죽편과 목편을 가리키며 간(簡)은 대부분 중요한 공문이나 서적, 율령(律令) 등을 기록하는데 썼으며 간서라고 했습니다.
죽간(竹簡)을 제작할 때는 대나무를 불에 구워 진액을 제거한 후 청피를 긁어내 글자를 쓰기에 쉽고 또 곤충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과정을 살청(殺青) 또는 한청(汗靑)이라고 했습니다.
한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별록(別錄)에는 '살청이란 대나무로 간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막 자른 대나무에 땀이 있으면 썩기 쉽기 때문에 간을 만들 때는 모두 불에 구워서 건조시켰다. 진(陳)·초(楚) 지역에서는 이것을 한(汗)이라 하는데 액체를 제거한다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후대에는 서적을 탈고하거나 저작을 완성하는 것을 살청이라고 했고 한청은 역사책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독(牘)은 목간을 가리키며 사적인 편지, 계약 내용이나 장부 등을 기록할 때 썼습니다. 편지를 쓴 후에는 비슷한 크기의 목판을 이용해 독 위에 글자를 새긴 표지를 했습니다.
이 목판을 가리켜 검(檢)이라고 했으며 검은 지금의 편지봉투와 유사한 것으로 그 위에는 받는 사람의 성명, 주소가 있었고 이를 서(署)라고 했습니다.
또 독과 검을 노끈으로 한데 묶은 것을 함(緘)이라고 했으며 비밀을 유지하고 전달자가 몰래 편지를 뜯어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검 위에 고랑을 새긴 뒤 구멍을 뚫어 끈을 묶고 그 위로 진흙을 단단히 덮은 뒤 인장을 찍어 증거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봉니입니다.
한나라 때 황제는 자색 인장이 새겨진 서신을 썼기 때문에 자니(紫泥)와 자니봉(紫泥封)은 황제의 조서를 대신하는 단어로도 쓰였습니다.
봉니는 전국시대부터 한나라를 거쳐 위진(魏晉)시대까지 널리 쓰였지만 진(晉)나라 이후 종이가 널리 보급되어 간독을 대신하면서 봉니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씬위(心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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