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지초화상은 남북조시대 섬서 풍익 전(田)씨 집안사람으로 속명은 전선우(田善友)라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가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자라서 불문에 귀의할 뜻을 비치자 부모는 몰래 그를 위해 혼사를 준비했습니다.
지초가 이를 알고 곧 산으로 도피했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끌려와 강제로 혼례를 치렀습니다.
신혼초야에 지초는 신부에게 진지하게 불문에 귀의하고자 하는 자기 뜻을 밝혔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불법(佛法)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지초와 각 방을 쓸 것을 허락했습니다.
매일 밤 지초는 선정(禪定)에 들었으며 27세 되는 날 마침내 출가하여 산서태원 개화사의 혜찬선사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입산한 지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잡일들을 불평없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근기를 높이 산 혜찬이 비로소 지초을 제자로 거두었습니다. 계를 받은 후 지초는 고향의 산속에 선림(禅林)을 만들고는 그곳에서 힘들게 수련을 계속했습니다. 그러한 중에 그의 지혜롭고 반듯한 인품은 먼 지방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수나라 말년. 잦은 전란으로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도적이 횡행하고 백성의 시체는 곳곳에 널려있었습니다. 이때 지초는 사람들을 모아 불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웃 마을에 도적 떼가 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양식을 도적들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워 각자 피신하려고 했습니다. 지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옳음이 백 가지의 그릇됨을 누른다’라고 설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며칠 후 밤 지초와 사람들이 정좌하고 있을 때 돌연 하늘로부터 불꽃이 충천하더니 도적들이 흉기를 손에 들고 문을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지초와 사람들은 단좌한 채 한 사람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도적들은 그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감화되어 지초에게 큰절을 올리고 불법에 귀의했습니다.
당 고조 이연이 백성을 구조하기 위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지초는 그것을 옹호해 승려를 이끌고 진양으로 가서 법을 폈으며 그에게 불법을 배우러 온 사람은 수백 명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계율과 질서를 엄격히 지켜 세인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으며 당시 사회질서를 안정하게 하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당나라 대군이 남쪽의 내란을 평정한 후 당고조 이연은 지초를 태극전에 오를 것을 청했으나 지초는 이에 응하지 않고 수련할 장소를 찾아 산서지방을 거쳐 전국을 전전하다가 계휴시 서남의 금산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산봉우리의 이름은 포복이라고 했는데 백장이나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천길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으며 바위가 수려하고 숲의 바람이 고른 것이 선경(仙境) 같았습니다.
지초는 무덕7년, 백여 명의 제자와 이곳 포복암에 와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식량은 여섯 석의 보리뿐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루 식사로 보리 다섯 알씩을 먹으며 봄과 여름의 두 계절을 보내자 보리는 셀 수 있을 정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들은 하루 두 알의 보리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후로 보리는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지초가 제자들을 모이게 하면 종소리가 따라서 바로 울었고, 산 위 바위에서 나는 샘물은 사람의 숫자에 따라 저절로 늘거나 줄어들었으며, 안일을 추구하는 제자가 있으면 어딘가 로부터 경고음이 울려 정념을 되찾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초의 일생을 통해 전해지는 신적인 발자취는 헤일 수 없이 많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가뭄이 들자 지초가 수련하고 있는 금산 을 향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지초는 밥을 먹던 제자 막사에게 명하여 쌀뜨물을 서남방향으로 뿜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안 일대에 단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지초를 '금산활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지초는 병에 걸렸는데, 그는 수명이 곧 끝날 것을 알고 더욱 분투하여 수련했습니다.
정관 15년(서기 641년) 3월 11일 지초는 원적했으니 향년 71세였습니다.
당태종이 군신을 이끌고 지초를 만나러 금산의 포복암에 왔을 때는 그가 이미 원적했을 때였습니다. 태종은 상심하여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望佛)이다!"라며 하늘을 향해 탄식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공왕고불(空王古佛)'이라는 네 글자와 지초화상의 윤곽이 나타나, 태종은 지초화상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했으며 그곳에 운봉사를 짓게 했습니다. 태종은 순행을 마치고 공산 영계사로 돌아와 아름다운 사원의 경치를 보며 즉시 한 수의 시를 지었습니다.
순행 후 복지로 유람하니
눈에 무척 아름답고 새벽 향기가 노니는구나
보배로운 사찰 멀리 이슬을 받드니 하늘 꽃이 봄에 가까이 오네
범종이 두 시를 알리니 법의 날이 쌍 바퀴를 돌리는도다
적막한 그대 선경에 드니 속세에 초연하구나
태종은 영계사에서 6일을 머물렀습니다. 세월이 지나 사람들은 그날을 회상하여 절 이름을 회란사(回銮寺)라고 고쳐 부르고, 용천묘를 지어 그때를 기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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