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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생존 방법과 천안문 학살 주도한 보이보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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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칼럼니스트 장웨이핑에 의하면, 진현의 간부들은 보시라이의 정치 행보를 못 마땅히 여겼고 보시라이의 인품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보시라이는 퇴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다. 보시라이는 농업과 실물 경제를 몰랐고, 농민들에게는 진실하고 실질적인 행정가가 필요했다. 실속없이 언변으로 환심을 사려 하니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청소부마저 그의 책상 청소하기를 싫어했다. 관리들 대부분이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고 사무실에 들어와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늘 책상 위에 삼국연의를 쌓아 놓고 틈만 나면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한번은 구카이라이가 진저우에 왔다. 보시라이는 현지에서 가장 뛰어난 목수에게 구카이라이에게 선물할 옷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재료비만 200위안에 달할 정도니 당시로서는 최고급에 속했다. 그러나 완성품을 본 보시라이는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미흡하다며 약속한 금액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목수는 곳곳에 소문을 냈고, 사람들은 보시라이가 약속을 어기고 부당한 이득을 챙겼다며 수군거렸다.


이후 그는 시 기율검사위원회에 신고되어, 시위원회 부서기 볜궈성(卞國勝)에게 호출되었다. 그는 볜궈성을 보자마자 삼촌이라 부르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연신 허리를 굽혔다. 고발당한 이야기를 듣자 그는 이혼한 전처에게 시달려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돌아가 즉시 돈을 갚겠다고 말했다. 볜 서기는 보시라이를 용서했고, 보시라이는 돌아가자마자 쩌우센웨이를 시켜 목수에게 돈을 주라고 했다. 쩌우센웨이는 목수에게 돈을 돌려주면서 몇 차례 때리고 진현에서 내쫓았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보시라이에 대한 진현 공무원과 간부들의 여론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1985년에는 직책을 내려놓고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보시라이가 실질적인 업무는 하지 않고 겉치레만 신경쓴다는 것이다. 특히 개발구 간부와 공무원들의 맹렬한 반대는 보시라이호의 좌초로 이어질 뻔 했다.


진현에서 물러난 뒤에도 보시라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당시 여론을 종합해 보면,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고 빈둥거린다’, ‘사람을 업신여긴다’, ‘관악대 공연을 한다고 분주하더니, 고위 간부 접대 광장을 건립한다고 한다’, ‘권투시합을 개최한다’, ‘미녀 패션모델 학교를 세운다’ 등 다양했다. 이에 지방관리 수십 명이 연대서명하여 상급기관에 보시라이를 성토하며 해임을 건의했다.


이때 보시라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구카이라이였다. 화려한 언변과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던 구카이라이가 내조에 나섰다. 그녀는 고위 간부의 아내들을 만나고 다녔다. 처음 다롄시 서기 비시전(畢錫楨)의 집을 찾아갔지만 소득이 없었고, 다음에 찾아간 것은 부서기였다. 부서기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구카이라이가 눈물로 호소하자 부서기와 보시라이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고, 부서기는 진저우현과 개발구의 간부들을 소집해 보시라이에게 기회를 주라고 독려했다. 부서기는 또 시위원회 고위 간부를 설득해 보시라이에 대한 압박을 풀게 해줬고, 보시라이는 이로써 고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4년간 수모를 겪은 보시라이는 1988년 진저우의 구 단위 간부에서 시위원회 선전부 부장 겸 상무위원으로 진급했다. 당시 보이보는 사상공작 업무를 핑계로 후야오방의 집을 드나들며 보시라이를 후방 지원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학살사건 당시 보이보는 대표적인 강경론자였다. 홍콩 언론에 따르면 1989년 5월 6일 보이보는 덩샤오핑에게 형세가 악화되고 있으니 과감한 조치로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5월 15일 보이보는 중공 원로를 대동하고 덩샤오핑을 방문해 무력으로 동란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5월 18일 밤 10시, 덩샤오핑의 제의에 따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덩샤오핑, 천윈, 펑전, 왕전, 보이보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를 거쳐 베이징에 계엄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제 26집단 77사단이 베이징 시외에 도착해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보시라이는 당시 매일 보이보와 장시간 통화하면서 정세를 파악했다. 보시라이는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성공을 두려워했다. 만약 중국이 민주화된다면 공산당 독재가 끝나고, 보시라이 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형사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6.4 학살이 벌어지자 자오쯔양이 총서기에서 물러났다. 보시라이는 지역 내에서 학생 운동에 동조한 세력을 색출해 숙청했다. 또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기자들을 모두 전출시키고, 민주화 운동 중 사용했던 표현을 금지했다. 보시라이는 진저우시에서 많은 문인을 발탁해 다롄시의 신문사, 방송국에 배치했다. 당시 동북지창(東北之窗)과 같은 언론사가 설립됐으며, 언론 내부에 자신의 인물을 배치해 세력을 확장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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