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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韓信) ‘한나라의 천하를 평정하다’ (1)

편집부  |  20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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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SOH] 전국시대 말기 여러 제후들이 할거해 분열되었던 국면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됐다. 진시황은 재위 37년 순행을 나갔다 사구(沙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은 유조(遺詔)에서 장자인 부소(扶蘇)를 불러 장례를 주관케 하고 도성에 들어와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조서를 관리하던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李斯)와 결탁해 거짓 조서로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어린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이세(秦二世)다.


진이세가 즉위 후 진시황의 옛 신하들과 황실의 종친들을 멋대로 살해하자 진시황이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제국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이세 원년(기원전 210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900명의 수졸(戍卒 변방에서 수자리 하는 군사)을 인도해 가다 대택향(大澤鄉)에서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斬木爲兵)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으며(揭竿爲旗)” 진이세의 통치에 도전했다.


그들은 진(陳) 땅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초(楚)’ 또는 ‘장초(張楚)’라고 했다. 이를 기회로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앞다퉈 자신의 역량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군웅이 할거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치 여러 제후들이 각축하던 전국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1. 한중(漢中)대책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6월 유방은 좋은 날을 택해 단을 설치하고 목욕재계한 후 예를 갖춰 한신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했다. 임명식을 마친 후 유방은 한신에게 관중을 되찾을 계책이 있는지를 물었다. 한나라 군은 병사는 약하고 장수가 적어 근본적으로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유방은 큰 목표라 할 게 없었고 가장 큰 소원이 관중왕(關中王)이 되는 것이었다.


한신은 유방에게 우선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다투려면 가장 큰 적이 항우임을 지적하면서 유방에게 용감하고 사납고 어질고 굳센 점에서 또 병력면에서 항우와 비교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유방은 “내가 항왕만 못하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용기는 물론이고 인자함의 측면에서도 자신이 항우만 못함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자 한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린 후 말했다. “대왕께 축하드립니다.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대왕께서 항왕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물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비록 강대하지만 대왕께선 분명 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항우 성격의 약점을 분석했다. “항우는 비록 남보다 용맹하고 크게 화를 내 소리를 지르면 천군만마를 물리칠 수 있지만, 재능이 있는 자를 등용할 줄 모르니 이는 필부의 용기(匹夫之勇)에 불과합니다. 비록 평소 사람을 대할 때면 공손하고 자애롭고, 부하가 병에 걸리면 따뜻하게 문안하지만 실제로 벼슬을 주어야 할 때가 되면 인장이 닳을 때까지 망설이며 선뜻 내주지 못하니 이는 아녀자의 인(婦人之仁)에 불과합니다.


또한 항우는 패왕이 된 후의 조치도 타당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천하의 패자를 자처하면서 오히려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에 도읍을 정해 지리적 이점(地利)를 잃었습니다. 둘째,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어기고 분봉 역시 공평치 못했습니다. 좋은 땅을 공이 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친애하는 사람에게 나눠줘 여러 제후들의 불만을 샀으니 이는 인화(人和)의 이로움을 잃은 것입니다. 셋째, 항우가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자 제후들이 이를 본받아 자기 땅의 군주를 쫓아내고 자립해 천하가 큰 혼란에 빠졌으니 천시(天時)의 이로움을 잃은 것입니다. 넷째, 항우는 가는 곳마다 학살과 파괴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한신의 분석에 따르면 항왕은 명의상으로는 패주(霸主)였지만 사실상 천하의 민심을 잃었다. 만약 유방이 그 반대로 할 수 있다면, 즉 유능한 장수를 임명해 기율이 엄한 군대로 정의의 깃발을 내걸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장사들의 소원을 따른다면 반드시 초패왕을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한신은 전망했다.


당시 한나라가 관중을 회복하는 데 첫 번째 걸림돌은 장함, 사마흔, 동예 3인이었다. 한신은 이들을 상대하기란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진나라의 장수들로 다년간 전투에 나섰고 수하의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이들이 초나라에 투항한 후 항우는 진나라의 20만 병사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버리고 오직 세 장수만 살려두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부모형제들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어 이들이 비록 관중의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중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반면 유방은 무관(武關)에 들어올 때부터 소하의 건의에 따라 백성들과 약법삼장을 맺고 나머지 일체를 간섭하지 않았다. 때문에 관중 백성들은 이를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들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만약 유방이 동쪽으로 병력을 움직인다면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삼진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신의 이 ‘한중대책’은 항우와 천하를 다툰다는 장기 계획을 제출하면서 단기적으로 관중을 탈취할 전략을 분명히 했다. 그 전략은 분석이 투철하면서도 명확하고 견해가 독창적이다. 그는 전쟁의 승패를 단순히 군사력의 강약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민심의 향배와 연관시켰다. 또 쌍방의 장단점을 분석할 때도 미래의 변화와 변화의 조건 및 시기까지 내다봤다. 이에 대해 후인들은 한신의 ‘한중대책’을 제갈량의 ‘융중대책(隆中對)’과 함께 거론하며 그 치밀함과 완벽함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방은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 첫 번째 목표는 바로 관중을 공략해 삼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 (계속) 大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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