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손오공은 흑풍산에서 금란가사를 되찾다-31회
[SOH] 지난 시간 근두운을 타고 흑풍산을 향해 날아오른 오공은 잔디밭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세 요괴 중 얼굴이 검은 요괴한테서 가사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과연 그는 순순히 가사를 내놓을까요?
여기까지 듣고 난 오공은 여의봉을 메고 바위 뒤에서 훌쩍 뛰어나왔습니다.
오공 : “너 이 도적놈들아! 내 가사를 훔쳐다 놓고는 불의회를 열겠다고? 불한당회가 좋겠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서 내 가사나 가져오너라.”
오공이 다짜고짜 여의봉을 들어 정면으로 내리치자 얼굴이 검은 요괴는 한 자락 바람이 되어 도망치고, 다른 하나는 구름을 잡아타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흰옷 입은 도사 차림의 요괴만이 여의봉에 맞아 죽었는데, 그것은 사람으로 둔갑한 산무애뱀이었습니다. 분을 삭이지 못한 오공은 그것을 예닐곱 토막으로 회를 쳐버린 후 얼굴이 시커먼 요괴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칼날 같은 봉우리를 싸고돌아 가파른 준령 하나를 넘어서자 깎아지른 것 같은 낭떠러지 앞에 동굴 입구가 보였습니다. 오공이 동문 앞에 이르러보니 현판에는 ‘흑풍산 흑풍동’ 이란 글자가 큼직큼직하게 씌어 있었습니다.
오공 : “문 열어라!”
졸개 : “넌 어디서 온 놈이기에 남의 신선동을 함부로 부수려 드는 거냐?”
오공 : “돼먹지 못한 녀석아! 여기가 어떻게 신선동이라는 거냐? ‘신선’이란 너 같은 녀석들이 감히 가져다 쓰는 말이 아니다. 말 같지 않은 말 중얼대지 말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 너희 그 숯검댕이 녀석한테 일러라! 빨리 이 손어르신의 가사를 가져다 바치라구 말야.”
졸개 : “대왕님! ‘불의회’는 열지 못하게 되나 봐요. 지금 문밖에 뇌공처럼 생긴 털보 중이 찾아와 가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사납기가 끝이 없습니다.”
요괴 : “아니 뭐야! 그 무례한 놈이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이냐? 내 이놈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애들아! 어서 내 갑옷을 가져오너라.”
검은 갑옷 눈부시게 번쩍이며
검은 숯 달린 창 한 자루 손에 쥐고
검은 장화까지 신고 있구나.
검은 눈동자 전광석화처럼 빛을 내니
이놈이 바로 산중의 흑풍왕이로세.
오공 : “네 녀석은 숯가마에서 나온 거냐? 아니면 숯쟁이 출신이냐? 어찌 그토록 검을 수가 있느냐?”
요괴 : “네 놈이 어떤 놈인지 몰라도 그토록 무례한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오공 : “잔소리 말고 관음원에서 훔쳐온 이 손어르신 가사나 가져다 바쳐라.”
요괴 : “돼먹지 못한 놈! 그러니까 간밤에 불을 놓은 것이 네놈이었구나. 그래 네놈이 용마루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때 내가 가사를 가져왔다. 그래 어쩔 테냐? 신통한 재간도 없는 녀석이 어디서 감히 큰소리를 탕탕치는거냐?”
오공 : “이놈아! 넌 나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천상의 제천대성이며 지금은 당나라 황제의 어제 삼장법사의 수제자로서 정과를 얻으러 서천에 가는 길이신 손오공님이시다.”
요괴 : “알고 보니 네 놈이 바로 언젠가 천궁을 떠들썩하게 한 필마온이로구나?”
오공 : “너 이 더러운 요괴야! 가져오라는 가사는 안 가져오고 누구더러 감히 필마온이라더냐? 꼼짝 말고 이 여의봉 맛이나 봐라!”
오공이 금고봉을 들어 요괴의 정수리를 내리치자 요괴는 몸을 슬쩍 피하고는 긴 창을 휘두르며 맞받아 나섰습니다. 채색 안개 내뿜고 불꽃 빛살 토하는 두 요선의 싸움은 어느 쪽이 이길지 헤아려 점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공은 하찮은 필마온 벼슬을 내동댕이치고 하늘과 싸워 제천대성으로 벼슬을 바꿨었고, 흑풍귀는 흑대왕이 된 요정의 왕초였습니다. 이들은 무려 수십 합을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습니다.
요괴 : “손오공! 우리 잠깐 쉬었다가 점심이나 먹고 다시 겨뤄 보자!”
오공 : “이 자식아! 그러구두 명색이 사나이냐? 반나절도 안 됐는데 벌써 처먹을 생각을 하다니. 이 오공은 5백 년 동안이나 산 밑에 깔려 있으면서 물 한 모금 못 마셨지만 배고픈 줄 모르고 지냈다. 냉큼 내 가사를 내놓으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처먹을 생각일랑 아예 마라!”
요괴 : “난 모른다.”
그러나 요괴는 창을 들어 슬쩍 빼더니 동굴 속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졸개들을 불러 연석을 차리게 하는 한편 초대장을 써서 사방의 요괴들을 생일잔치에 청할 준비를 했습니다. 오공은 하는 수 없이 관음원으로 돌아와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다시 구름을 타고 흑풍산으로 향하는 도중 작은 요괴 하나가 초대장을 들고 관음원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공은 그 요괴를 죽이고 노승의 모습으로 둔갑한 후 초대장을 들고 흑풍동으로 날아갔습니다.
오공 : “문 열어라!”
졸개 : “대왕님! 금지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
오공이 요괴의 안내를 받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서 보니 뜨락엔 소나무와 대숲이 우거져 있고 복숭아와 오얏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윽한 꽃향기 풍기는 가운데 중문에 이르자 거기엔 한 구절의 대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조용히 심산 속에 묻혀 있으니 속된 생각 없고
그윽히 신선동에 숨어 지내니 참된 재미 한없네.
오공이 흑풍왕과 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요괴 하나가 달려와 숨을 헐떡거리며 오공이 초대장을 가져간 요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요괴 : “내 그럴줄 알았지. 어쩐지 금지장로가 오늘 올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했더니 과연 오공 이놈의 장난이었구나.”
오공과 요괴는 엎치락뒤치락 흑풍동에 일대 소동을 일으키며 동문 밖에서 산꼭대기로, 산꼭대기에서 다시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 서로 안개를 토하고 바람을 일으키면서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괴는 슬쩍 한 자락 바람으로 화해 동굴로 돌아가서는 돌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공은 다시 관음원으로 돌아와 밤을 지샌 후 삼장법사의 성화를 받으며 관음보살을 찾아 나섰습니다.
보살 :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
오공 : “저의 스승님께선 서천으로 가던 길에 관음원이라는 당신의 선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곳 사람들의 공양을 받아들이면서도 왜 요괴를 이웃에 살게 해서 우리 스승님의 가사를 훔쳐가게 한 것입니까? 그놈은 훔쳐간 가사를 한사코 돌려줄 생각을 안 합니다.”
보살 : “난 이미 다 알고 있다. 네 놈이 부질없이 자랑을 하면서 가사를 내보였기 때문에 나쁜 놈이 검침한 마음을 먹게 된 게 아니냐? 게다가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부채질해서는 나의 사찰까지 깡그리 태워 놓고서 도리어 나한테 와서 행악질을 해?”
오공 : “보살님! 부디 이놈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실은 보살님이 하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요괴 놈은 가사를 돌려주지 않고 스승님께서는 긴고주를 외워대는 바람에 전 머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부디 자비심을 베풀어 저를 도와 가사를 되찾게 해주십시오.”
보살 : “그 요정은 신통력이 대단해서 너만 못지않다. 내 이번엔 당승을 봐서 너와 함께 가주마.”
보살은 즉시 오공의 안내를 받으며 흑풍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흑풍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 마침 유리쟁반에 선단 두 알을 담아 들고 오는 도사와 마주쳤습니다. 오공은 즉시 여의봉으로 그자를 때려죽였습니다.
보살 : “너 이 원숭이 놈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서 함부로 생목숨을 해치는 거냐?”
오공 : “보살님 이놈은 검둥이 요괴의 친구로서 풀밭에 앉아 한담을 나누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모레가 요괴 녀석의 생일이기 때문에 오늘 앞당겨 생일 축하를 오고 내일은 ‘불의회’에 올 판이지요.”
보살 : “네 말이 사실일 것 같으면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오공이 죽은 도사의 시체를 들쳐보니 그것은 한 마리의 늑대였습니다. 유리 쟁반을 들어보니 그 밑굽에 ‘능허자 만듦’이라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공 : “보살님! 일이 참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요괴 놈의 목숨이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보살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오공 : “보살님이 도와주시면 전 이놈을 역이용해볼까 합니다.”
보살 : “그래 말이나 들어보자.”
오공: “이 ‘능허자 만듦’이란 글자로 보아 이 도사는 틀림없이 ‘능허자’라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전 이 쟁반의 선단 하나를 먹고서 좀 더 큼직한 선단으로 둔갑할 테니 보살님께서는 이 도사로 둔갑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놈에게 저를 먹게 해 주시기만 하면 제가 그 뱃속에서 한바탕 야료를 부려 가사를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보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변화무쌍한 법력으로 순식간에 능허선자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두루미인 양 우아한 풍채 알릴 듯 말 듯한 가벼운 걸음
송백같이 기품 있는 얼굴 그 수려함 고금에 드물어라.
오고감에 멈춤이 없고 변함없이 스스로 거룩하거니
통틀어 하나의 불법에 속하건만 더러운 채구와는 담을 쌓았네.
오공 : “와아, 정말 멋지군요! 보살님이신지 요정인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보살 : “오공아! 보살이건 요정이건 다 일념에서 일어나는 거란다. 근본을 따진다면 모두가 ‘무’에 속하는 거지.”
오공은 얼핏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얼른 몸을 돌려 한 알의 선단으로 둔갑했습니다. 이래서 이들은 계획대로 오공이 흑풍왕의 뱃속에 들어가 그를 항복시키고 보살은 자비심이 일어 요괴를 죽이는 대신 금고테를 씌워 산지기로 쓰겠다면서 남해로 데리고 갔습니다.
시에 노래하기를
상서로운 구름 엉겨 금부처 이루고 만법이 찬란하니 실로 칭송할 만하네.
보살은 자비의 손길로 만인을 구제하고 법계를 두루 살피자 금련꽃 피어나네.
지금까지 전해오는 많은 경전의 뜻도 본자리로 가보면 흠 한 점 없는 청정함이네.
진정 괴물의 항복받고 대해로 돌아가니 선문은 다시 금란가사를 되찾았네.
-2023년 10월 2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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