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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명장(忠義名將) 악비

하지성 기자  |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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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NS]


[SOH] 2003년 12월, 중국은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이 일었다. 중국 교육 당국이 개정한 교육대강에 ‘악비는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민족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한 것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동안 악비 장군은 중국사에서 이민족에 맞서 싸운 충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악비 장군이 민족통일을 방해한 인물로 격하되고 있다.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의 부메랑으로 자국의 충의명장인 악비 장군을 폄하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새겨준 어머니


악비 장군(1103∼1141)은 남송(南宋) 초기에 문무를 겸전한 명장으로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相州) 탕음(湯陰, 현 하남성) 사람이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후에는 활쏘기를 익혔는데 무예가 뛰어나 양손으로 다 활을 쏠 수 있는 백발백중의 명궁이 되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요, 서하와 강화를 맺고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歲幣)를 바치며 평화를 유지했다. 금나라가 일어나 강성해지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금나라와 1120년에 해상(海上)의 맹약을 체결하고 요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때마침 목주와 산동성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악비는 20세 나이로 군에 입대해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워 병의랑이 되었다. 얼마 후 부친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금나라가 요를 함락시키고 송나라 수도 개봉으로 진격해오자 악비는 다시 의용군에 지원한다.


소설 ‘설악전전(說岳全傳)’에 의하면, 악비가 군대로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 도씨(桃氏)는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아들을 불러 선대의 위패에 절을 올리게 한 뒤 “나라에 충성하고 불의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며 그것을 깊이 새기라는 뜻에서 그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의 문신을 새겨 주었다. 하지만 ‘국(國)’ 자의 마지막 점은 새기지 않았는데, 이는 악비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할지 모르지만, 정충보국을 실현하고 살아서 금의환향하게 되면 그때 마지막 점을 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이 네 글자는 악비를 명장으로 만들어준 평생의 신념이 되었다.


■ 악비 장군의 지략과 심법


악비가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기병 1백여 명과 황하 기슭에서 훈련을 하던 중 갑자기 적지 않은 수의 금나라 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군사들이 당황하자 악비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우리보다 많지만 우리 병력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이길 수 있다.” 악비는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고무된 병사들이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하자 적군은 황급히 도망쳤다.


정강(靖康) 2년(1127년), 금나라 군사가 다시 남하해 사수를 침공했다. 악비는 죽노도(竹蘆渡)에서 적과 마주해 한밤중에 3백 명의 병사에게 횃불로 온 산을 밝히게 했다. 이를 본 금나라 병사들은 온 산을 메운 적군에 놀라 허둥지둥 도망가기 시작했다. 악비는 금나라 병사의 대열이 흩어진 틈을 타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악비는 고종으로부터 ‘정충악비(精忠岳飛)’라 새긴 깃발을 하사받았고 32살의 젊은 나이에는 절도사가 되었다.


악비 장군는 충의로운 심법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병사에 대한 지극한 관심, 공평무사한 대우, 겸손하고 모범을 보이는 자세, 용맹함, 지혜로움으로 역사에 길이 추앙받는 위대한 명장이 되었다.


악비 장군의 휘하군대였던 악가군은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을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는다’는 규율이 있었다. 그러나 사병에 대한 악비 장군의 사랑은 지극했다. 사병이 아프면 약을 지어주고, 원정을 갈 때면 장병의 가족을 다독이고 전사자 유족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또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었다. 악가군은 이러한 악비 장군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생사를 함께하여 천하를 떨게 하는 불패의 군대가 되었다.


■ 억울한 죽음과 명예회복


주선진까지 진격한 악비 장군은 고토를 수복하고자 황하를 건너 바로 금의 심장부인 황룡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때 고종과 재상인 진회(秦檜)는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껴 악비 장군에게 철군을 명하였다. 악비 장군은 “십년 고생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구나!”하고 탄식하며 군사를 돌렸다. 그 후 고종과 진회는 사람을 파견해 금나라에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악비가 금나라에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자 진회는 악비를 모함하는 상주서를 조정에 올렸고 악비는 관직을 내놓고 악주로 은퇴했다.


그러자 진회는 악비의 악비군의 부장인 왕귀, 왕준 등을 사주해 악비의 수하 장수 장헌(張憲)이 악비와 악비의 아들 악운을 도와 병권을 탈취하려고 병변을 일으켰다고 참소했다. 이 일로 소흥 11년(1141) 장헌과 악비, 악운은 감옥에 갇혔다. 진회는 어사중승 하주(何鑄)를 보내어 악비를 심문했는데, 악비는 두말없이 옷을 벗어 등에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 문신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 감동한 하주는 악비를 심문하지 않고 옥으로 돌려보냈고 악비의 반역도 의심했다. 그러자 진회는 하주를 따돌리고 만사설에게 명해 악비의 죄목을 만들게 했다. 소흥 11년(1141년) 12월, 진회는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수유(莫須有)’라는 죄명으로 임안의 감옥 풍파정(風波亭)에서 악비를 독살하고 악운과 장헌도 참수했다.


당시 외순이라는 한 옥리는 매일 대했던 악비의 인품에 크게 감동받아 옥중 악비의 유해를 운반해 교외 채소밭에 묻었다. 후에 임종을 앞둔 외순은 그의 아들에게 훗날 악원수의 원통함을 씻을 날이 올 것이라며 이 사실을 적어 연통(鉛桶)에 넣어 시신 곁에 묻을 것을 당부했다. 22년 후, 효종(孝宗)은 악비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의 충심을 기려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1914년 이후, 악비묘는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됐다.


후에 악왕묘 층계 아래에는 진회(秦檜)와 그의 부인 왕씨(王氏), 만사설(万俟卨), 장준(張俊) 이 네 사람의 상을 만들어 손을 뒤로 결박해 무릎을 꿇려서 앉혀놓았다. 악왕묘를 참배하는 중국의 한족은 이들의 상에 침을 뱉거나 돌이나 몽둥이로 구타하는 바람에 철상이 훼손돼 여러 번 보수했다. 또 밀가루로 진회의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작회(油炸檜)라는 요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인은 간사하고 나쁘다는 것을 종종 ‘진회와 같다’는 표현을 쓴다.


■ 악비의 충절이 담긴 전북 삼례 비비정(飛飛亭)


전북 삼례읍 후정리 남쪽 언덕 위에 있는 비비정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만나고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되는 만경강 한내(한천교 아래로 한내란 큰내라는 뜻)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


조선 선조 6년(1573)에 창주첨사(昌洲僉使) 최영길에 의해 창건된 후 영조 28년(1752)에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서명구에 의해 중건됐다가 철거되고서 1998년에 복원됐다. 비비정은 경치가 좋아 시와 운문을 즐기는 선비들이 자주 찾았고 이런 흔적은 비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비문에는 ‘고고한 달빛 아래서 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물결을 찾아 날아드는 기러기 떼에 시에 대한 흥취를 달래고 고기를 낚는 어화(漁火)를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것은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닮아 조선시대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는 이름으로 완산 8경(完山八景) 중 한 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적혀 있다.


비비정이라는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송시열이 지은 ‘비비정기’를 보면 우암이 최씨 집안을 찬양하려고 ‘장비’나 ‘악비’ 등 중국 명장의 이름을 붙여 비비정이라고 했을 뿐 지명을 취한 것은 아니다. ‘비비정기’는 최영길의 손자인 최양의 청탁을 받고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최양이 찾아와서 나에게 정자의 기문을 청탁했다. 그의 조부 최영길이 창주첨사를 지냈는 데 정자는 1573년 (선주 6년) 창건했다는 것으로 그의 부친 최완성도 나난만호를 지냈으며 최양 또한 조업을 이어 무관이었다. 당시 무관들은 추세 속으로 권문에 아첨하여 뇌물이나 바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청고한 인물이어서 정자를 일으키어 풍아하게 살았다.


최양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대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나서 한 일이다. 비비정이라 이름한 뜻을 물으니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는 하나 내가(송시열) 생각하기에는 그대의 가문이 무변일진데 옛날에 장익덕은 신의와 용맹스러운 사람이었고, 악무목은 충과 효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둘이 다 함께 이름이 비자였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무인의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장비와 악비의 충절을 본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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