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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28)
 
  
2007-10-10 04:37:48  |  조회 7611
오늘은 천시통을 제거하는 이야기로 시작하자
 
1994년 말, 중공 제14차 4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권력을 모두 넘겨주었다.  장쩌민은 이제 천시통에 손을 쓸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 초에 있은 ‘검거사건’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시급히 손을 써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이번에도 쩡칭훙이 장쩌민에게 계책을 내놓았다. 쩡칭훙은 원로들이 물러난 후 그들의 자녀들이  함께 뜻을 모으면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을 줄 수도 있으나 그렇게 호락호락 그들의 뜻대로  될 일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 태자당의 부정축재를 발목 잡아 ‘반(反)부패 정책을 내세우면 태자당이  공안, 검찰, 법원과 중앙기율위원회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장쩌민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14차 대회가 끝난 후, 자신의 두 아들 그리고 일곱 고모, 여덟 이모를 비롯한 많은 친척들을 중앙과 지방 정부 요직에 배치해 자신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반부패’를 명분으로 적수를 없애야 했기에 그들을 잠시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은 적수도 제거하고 ‘반부패’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 빈 자리가 생기면 다시 친척들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흐뭇한 타산을 한 장쩌민은 보이보의 제안대로 1차로 기베이징 부시장부터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장쩌민은 그다음 왕바오썬(王寶森)을 겨누고 있었다.
 
1995년, 수도 강철회사의 전임 이사장 저우콴우가 부패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아들도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또 베이징시 비서그룹 수뢰사건이 드러났으며 부시장 왕바오썬은 4월에 베이징 외곽 화이러우(懷柔)현에 있는 치펑차(崎峰茶)라는 산에서 죽었는데 관영 언론들은 그가 총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남아 있는 발자국, 상처 자국, 화약, 탄피 등의 단서로부터 보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알 수 있다. 더 명확한 증거는 탄피를 땅속에서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경찰들은 탄피를 찾을 수 없어 지뢰 탐지기로 땅속에 묻힌 탄피를 찾아냈다. 왕바오썬이 죽은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으며 사건 발생 후 현장이 잘 보호되어 있었다. 탄피가 땅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죽을 때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 안전부 내부 소식에 따르면 당시 장쩌민이 파견한 국가안전부 스파이가 왕 부시장을 죽였다고 한다.
 
왕바오썬의 죽음은 천시퉁을 당황하게 하였다. 중공 정계의 게임 규칙에 따르면, 무엇을 언론에 내보내는지는 전적으로 최고 지도자의  생각에 달렸다. 왕바오썬의 죽음이 CCTV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되고 있다는 것은 권력 투쟁의 폭풍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우콴우의 아들 저우베이팡(周北方)이 판결을 받자 덩샤오핑마저 후사를 우려하며 장쩌민을 섣불리 대했다가는 가문의 후손들도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시퉁은 덩샤오핑에게 보낸 장쩌민 검거 편지를 제출한지 몇 달이 지났지만 장쩌민이 여전히 자리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덩샤오핑이 그를 교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액운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쩌민은 무진장 애를 써서야 겨우 천시퉁이 “1991년 7월부터 1994년 11월 사이, 외교적 왕래에서 귀중한 선물 22점(금품 8점, 손목시계 6개, 고급 사인펜 4개, 사진기 3대, 녹화기 1대)을 받았는데 가치가 55.5만여 위안에 달했다(신화사 베이징 1998년 7월 31일 소식)”는 증거를 찾아냈다. 이만한 선물은 정치국위원 자리에 있는 관리로 놓고 말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매우 청렴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시퉁은 공금횡령죄 13년, 직무 유기죄 4년을 합쳐서 16년 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2003년 말, 천시퉁은 전립선암에 걸린 후 보석으로 석방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기간 천시퉁은 5만자에 달하는 고소장을 써 장쩌민의 정치박해를 폭로하면서 자신은 권력투쟁의 희생물이라고 했으며 장쩌민 부자(父子)의 경제 부패를 고발했다. 천시퉁은 일찍이 장쩌민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장쩌민의 아들 장멘헝이 불법으로 국유자산 1,500만 위안을 유용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감 중인 천시퉁이 언론에 말할 수 있는 일부일 뿐으로 숨겨진 내막은 그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공의 ‘반부패’ 운동이 권력 투쟁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중국 국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현재 중공 고위층에 높이 앉아 있는 큰 탐관오리들인 자칭린(賈慶林), 황쥐(黃菊), 천량위(陳良宇) 등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부패는 이미 전반 중공 사회의 매 한 세포마다 침투되었다.
 
 
3. 대만해협 위기
 
1996년에 들어서자 곧 대만해협에 위기가 발생했다.
 
3월 23일,대만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대선을 실시했다. 총통 후보자는 리덩후이(李登輝) 외, 무소속 인사 천뤼안(陳履安)과 린양강(林洋港) 및 민주당 펑밍민(彭明敏)이 있었다.
 
장쩌민은 대만 민주선거가 국내 민중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불안해했다. 중국에서 민주선거를 무기한 지연시키기 위해 중공은 부단히 ‘국정론(國情論)’, ‘소질론(素質論)’과 “민주선거는 중국 전통문화에 어울리지 않다”는 등 황당한 논리들을 퍼뜨려 왔다. 때문에 중국 대륙 민중들과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핏줄이 서로 이어져 있는 대만에서 대선이 성공한다면 중공의 논리는 사실상 부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선거를 거치지 않고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독재자 장쩌민은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쩌민은 1995년 초, “조국통일 대업을 이루기 위해 계속 분투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했는데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당시 대만과 중국과의 관계는 긴장한 편이 아니었으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장쩌민은 대만 문제와 관련해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무능한 자기 주제를 몰랐던 장쩌민은 하마터면 전쟁을 일으킬 뻔했다.
 
1988년, 대만 총통이 된 리덩후이는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나라들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장쩌민을 불쾌하게 만들었는데 가장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리덩후이가 1995년 5월, 개인 신분으로 모교인 코넬대학을 방문하려하자 미국정부가 국회 상하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리덩후이는 모교에서 “나는 마음속에 항상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생각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을 발표해 그의 민주사상을 피력했다. 이런 리덩후이가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대만에서 처음으로 민주선거를 실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중공 군부 원로들의 선동 하에 장쩌민은 그를 한 번 혼내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훈련 문제에서 장쩌민은 상당히 신중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총을 만져 보지 못했고 한 번도 전투를 지휘한 적이 없는 군사위 주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바람이라면 군인들에게 정치 이론을 주입시켜 자신의 지휘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에서 오는 압력 때문에 장쩌민은 대신 지휘를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사람은 또 반드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심복이어야 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이 찾은 사람은 군사위 부주석 장완녠(張萬年)이었다.
 
 
4. 군부 내 장쩌민의 대리인
 
장완녠의 승직은 매우 아이러니했다. 1992년 장쩌민이 지난(濟南)부대를 시찰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장완녠은 지난부대 사령관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놓칠세라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중앙과 중앙군사위를 따르자”며 충성심을 보였다. 그 말속의 숨은 뜻은 장쩌민이 당중앙 핵심일 뿐만 아니라 중앙군사위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장쩌민은 직위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군부 내에서 시급히 측근을 배양해야 했다. 장쩌민이 장아이핑과 사이가 밀접했고 장아이핑을 비롯한 제3야전군 출신들이 양씨 세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장쩌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장쩌민은 ‘양아버지’의 상급들을 후배의 신분으로 대해야 했으므로 많이 불편했다. 때문에 오직 장쩌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장령만이 군부 내에서 장쩌민의 대리인으로 적합했다.
 
장완녠이 외친 구호에 흡족한 장쩌민은 베이징에 돌아오자 바로 장완녠을 중앙군사위 총참모장으로 임명했으며 1993년에는 또 상장(上將)으로 진급시켰다. 장완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쩌민의 앞에서 총참모부에 간부들을 모아놓고 큰 소리로 ‘부대는 영원히 당의 지휘를 따를 것이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는 “영원히 장쩌민 주석의 지휘를 따르겠다”는 것과 같았기에 장쩌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장완녠의 아첨이 엄청난 수확을 얻게 되자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역시 헛수고 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위융보(于永波)였다. 그는 장쩌민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첨한 덕분에 1992년 총정치부 주임이 되었으며 1993년 상장으로 되었다. 2001년 초, 위융보는 장쩌민이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에서 군부대 고위급 장령들을 초대한 연회석에서 “장쩌민주석 만세”를 불러 한 때 웃음거리로 되었다.
 
다른 한 아첨 전문가는 궈보슝(郭伯雄)이었다. 1992년까지만 해도 궈보슝은 소장급 장령인 47군 군장일 뿐이었다. 90년대 초, 장쩌민은 산시(陝西)에서 시찰하면서 47부대에 들렸다. 점심을 잘 먹은 장쩌민은 낮잠을 자려 했다. 궈보슝은 기회를 놓칠세라 보초병을 보내고 자신이 직접 문밖에서 보초를 섰다. 장쩌민이 두 시간이나 자고 있는 사이 궈보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으나 자리를 뜬 사이에 장쩌민이 깨어나게 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화장실도 가지 않고 버텼다. 장쩌민이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보니 한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므로 매우 흡족해 했다. 장쩌민이 그 군인이 나이가 좀 많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았더니 47부대 군장인 궈보슝이었다.
 
장쩌민은 어디서도 군장이 직접 보초를 서 주는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에 대해 호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궈보슝은 베이징부대 부사령관으로 승직했으며 나중에는 연속 세 단계 뛰어 올라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어 역시 상장 계급을 달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위 주석에 이러한 아첨쟁이 장령들이었기에 리덩후이는 중공의 군사 위협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5. 군사훈련
 
중공은 모두 3차례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한 차례는, 1995년 8월 15일부터 25일까지 대만과 90마일 떨어진 동해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른 한 차례는, 같은 해 12월 2일 실시하는 대만 입법위원회 선거를 교란하기 위해 11월 15일부터 25일까지 둥산다오(東山島)에서 해군훈련을 진행했다. 이듬해 초, 중공은 대만과 마주하고 있는 연해지역에 병력을 추가 배치했다.
 
중공의 빈번한 군사훈련과 병력 이동을 보자 미국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2월 하순, 중앙정보국 국장 존 도이치(John Deutch)는 중공의 군사훈련이 “잘못된 계산 혹은 의외의 사고”를 초래할까 봐 근심했다.
 
중공 군부는 대만 해협 센터라인을 초과하는 거리에 미사일을 쏜 다음 잠수함을 동원, 대만 주변의 섬을 점령하려는 진공계획을 세우고 훈련에 돌입했는데 이러한 훈련에는 40억 위안의 거금이 들었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중공에 “미사일 발사 훈련은 매우 경솔한 행동”이라고 직접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미국은 인디펜던스호와 니미츠호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으로 출동하게 했다.
 
장쩌민은 군부 내 강경파들이 절대 훈련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미국과 맞설 용기가 없었다. 그는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경우, 더 능력 있는 군부가 틈을 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고 나왔으며 첫째, 미사일은 대만을 통과하지 않고 둘째, 전투기와 군함은 해협 센터라인을 넘지 않으며 셋째, 대만 주변의 섬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규정을 세웠다.
 
당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내린 이 결정을 대만 스파이였던 해방군 소장 류롄쿤(劉連昆)이 리덩후이 총통에게 보고했다. 리덩후이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공산군이 쏘는 포탄은 모두 공포탄이어서 비만 내려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류롄쿤은 1998년, 대만 군사정보국을 배신하고 베이징에 넘어간 두 명의 관리에 의해 군사기밀을 누설한 일이 드러나면서 1999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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